■ 우리나라 山岳國
한국은 山地가 총 면적의 약 8할을 차지하는 山岳國이고 또한 농업국가이다. 그 땅의 이마는 산이고, 그 산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산 많은 나라니까 벽촌과 村落은 산선데 바로 그 수효가 된다.
여유있는 초원을 갖지 못하여 산이 서있지 않으면 평야로 논이며 밭이다.
농토는 산이라는 地標가 잡아 준 어떤 분기점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수 많은 중소 읍면을 합친 것이 한국이다. 위집된 도시 속에 읍과 면이 있지 않고, 촌락 속에 시 군이 있을 수도 없다. 호젓하고 외딴 곳에 약지 못한 족속들이 철저한 씨족 관계를 맺어 따로 모여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회지 사람들의 妄想일지도 모른다.
■ 시골은 休養地?
그래서 시골 간다 하면 피서나 휴양가는 줄 생각한다. 이제는 벼슬아치를 하려면 농민이 벗이라는 현수막을 곧 잘 내 걸어야 입신하기에 편리하게 됐다. 오늘날은 농민을 잘 다스려야 나라의 살림도 잘 되게 됐다. 아니 역설로 농민을 다스리기 보다는 이제는 다스리려는 사람들을 이 농민들이 다스리려 하지 않는가? 그래서 重農政策이 생기고 농민을 잘 살리면 나라의 부강 길도 바로 잡게 될 것이다.
종교 역시 대도시 지역에서는 과잉 상태다. 교회당의 종탑이 공장의 굴뚝만큼 솟아 있다. 「가 · 나 · 다」순의 종파 명단에 이름조차 없는 稀貴한 교파가 많다. 종교의 식민지 같은 인상이다. 과잉 종파는 시골로 밀려 나고 또 거기에 몰려있다. 이들이 서로 싸워 같은 마을에 제일 제이 제삼의 교파가 난립되고 차차 난폭한 집단이 되기도 한다.
마을마다 종을 때리고 저마다 꿇어 예배를 드린다.
■ 功和主와 農民
처음 사람들은 무관심에서 호기심의 흥망은 종교의 변란 때문에 넘어지고 일어서고 했다.
「天主實義」가 북경에서 흘러 들어와 또 나라안에는 東人 · 西人의 당쟁을 형성하게 되었고 다투는 양반, 상놈들의 갓은 피와 함께 자꾸만 땅에 떨어졌다. 천주학이 들어와 나라가 벌컥 뒤집어졌다.
儒生들에게는 천주학이 바로 역적이고 좌우포도청은 君令에 의해 그들을 押送하고 斬首하고 軍門梟首하기에 칼날은 피마를 날이 없이 백여년의 교난을 치루었다.
■ 시골은 宗敎植民地
천주학쟁이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 미친 사람들인가? 한국역사에 천주교 교난은 고작 두서너줄 끼어주고 손을 떼지만 한국 교회사는 바로 순교사 그것으로 피에 물들여 있다. 오늘날 예수쟁이를 희롱하는 것은 그때와 같은 그런 박해와는 바르다. 한국은 종교의 식민지 같은 미개지밖에 되지 않는가? 아니다. 천만년 끝없이 뻗어나 민족을 부흥시키고 正道의 길잡이 될 참된 정신 생활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교회가 필요하다. 한국을 미개지 아프리카를 찾아가듯 그렇게 찾지 말아야 한다. 외국의 일개포교지로서 수동적 위치에서 점차로 탈피 되어 가지 않는가. 이젠 잘못하면 우리에게서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독립과 자립이라는 낱말들이 자꾸 쓰이게 된다.
그래서 자립 교구도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적극적 자체 능력을 함양해야 하고 전교 방법과 기술도 검토 연구하여 시대적 적응도 굳이 배타할 것은 아니라 본다.
■統計數字의 魅力
한국의 천주교는 날로 번성하여 많은 교세증가를 보고있다. 전교가 어느 때 보다도 잘 되어 가고 있다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卓上에서 상승하는 통계표만 바라보고 안이한 自足感에 사로 잡혀서는 안된다. 비교적 도회지에서는 年間 수백 혹은 수천명의 수확을 바라본다. 하지만, 전체적 지역별로 보면 농촌전교 상황은 말이 아니다. 서울 · 대구 · 부산이라면 모르되 山岳地帶에 散在되어 있는 人口 비율을 안목에 둔다면 안이할 수는 없다. 적어도 한 군의 인구 수효는 10만에서 30만을 잡고 이에 비례하는 一群의 가톨릭 신자율은 너무도 한심한 수다.
더우기 본당 주재 읍면의 상태는 천명의 한 사람 꼴이 되지 않을가 싶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 農村 · 都市敎勢差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천주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읍면 민이 얼마나 많은지 실망할 지경이다. 시골 본당이 확장이 시대적 요청으로 보고싶다. 기껏 군소재의 스무개면에 한두공소만 세워서 일이 될가 걱정이다. 타교파에서는 장차의 그들 신도 호가보를 위하여 가톨릭에 앞서 이미 3·40년전에 파고 들어간데가 많고 한 읍에 7·8 교파가 병립하여 신앙 영토 확장을 위해 미래를 바라보고 맹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도시 중심의 전교 활동 개념을 버려야 한다. 천주교를 예배당으로 아는 이 미개척지에 힘을 주입시켜야 당장 보다 미래의 전교를 위해 유익하지 않을가.
현대기계문명은 공간을 없애고 시간을 단축시켜 주었다. 한국에서 아침 먹고 미국에서 저녁을 먹게 됐다. 백리 밖 파리의 눈알을 쏠 수 있는 정밀한 기계가 자꾸만 제조되어 하늘을 날으는 세상이다.
현대의 새로운 전교방법이 강구될 뿐 아니라 침체되어 있는 농촌포교활동도 같은 노력을 들여 몇배의 수확을 거들 수 있는 여러가지 주도한 계획이 시급히 요청된다.
한편 도시보다 시골일수록 전교가 잘 될 수 있는 조건도 없지는 않다. 부락 단위는 가족적 분위기와 씨족관계가 깊어 일단 파고 들면 연쇄적 접근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가톨릭 現代宗敎
불교는 현실참여라는 시대적 과업 앞에 너무 깊은 산 속에 幽閉된 듯 대화정신이 부족하다면 가톨릭은 市만 찾는 「모던」한 그런 종교인가? 福音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백성들 위에 마치 전파처럼 번져가는 것이다. 염주와 묵주의 생김새는 같지만 「액숀」이 다르고 經의 방향이 판이하다.
『너희는 가서 만민을 가르치라』 이 때문에 바다를 건너 산넘고 하늘을 날아서라도 가야만 한다.
어떻게 농촌 포교활동을 해야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오늘의 숙제이다. 물론 도시에서 하는 방법을 참고로 시골에 맞는 방법을 모색하여 「액숀」을 전개하지만 각기 주견과 관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여기 나의 소견을 첨부함과 동시 미력하나마 체험한 결과도 개입시켜놓을가 한다. (계속)
鄭淳在 (경북 의성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