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이 지상생활을 끝마치고 떠나실 때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인간의 구원이란 사명을 교회에 맡기셨다.
『내가 가르친 바 모든 것을 만민에게 가르치라』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선포는 가르치는 자와 그것을 듣는 인간상호관계를 필연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주는 이와 받는 이가 인간인 이상 인간적 요소를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어떤 사상을 전하기 위해서는 접촉과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자신이나 그들로 구성된 사회가 항상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복음전파에 첫째로 또 반드시 요구되는 접촉과 대화가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에 일률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남에게 전해누는 방법은 민족과 시대에 수응해서 거기에 알맞는 것이라야 더 능률적인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20세기가 절대로 중세나 고대와 같지 않고 한국민족이 다른민족과 같지 않다. 냉담된 서구라파를 회두시키는 것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외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20세기는 분업의 발전과 거기따라 사회적 기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졌다. 과거에 없던 직업들이 이수간에도 새로 생겨나고 있다.
사회조직이 간단했던 과거에는 신부, 수사, 전교회장만으로써 사회 각계각층과 접촉할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그렇지 못하다.
우선 신부 수도자 전교회장이라 하면 하나의 독특한 신분을 말하고 사회적 계급과 직업을 뜻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직업과 사회적 신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안간다. 그뿐 아니라 신부나 수도자가 모든 사회 각층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영웅적 신앙과 타오르는 열성을 가지고 남을 위해 일한다 하더라도 「로만칼라」를 하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특수한 사회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에 속하는 무리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가지셨다. 따라서 현대사회와 교회의 접촉은 여러 직장과 사회각층에 속해있는 평신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달리 말하면 평신자가 바로 사도직에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게된 시대이다. 사회가 변천하고 동적입면 그만큼 교회도 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외교인이 교회문을 두드리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교회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 교회문을 여는 역할을 평신도가 맡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선포에 요구되는 첫 조건인 접촉이 현대에는 평신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접촉에 따르는 것이 제2의 조건인 교리의 설명이다. 교리를 설명하는 자는 이는 그것을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을 수락하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결심하는 단계에까지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가 결정해야 할 이 문제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정확하게 이애애햐 하며 일종의 절대적 의무감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체면이나 환경에 휩쓸려 영세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진정한 입교가 될 수 없고 진정한 입교가 아니면 그 신앙생활이 오래 지속할 수 없고 냉담하게 된다. 교리를 똑똑히 설명하려면 개인의 성격과 지적 수준을 파악해야 된다. 교리교사의 항상 유의해야 할 점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교회전체나 교회의 용어를 곡해(曲解)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먼저 그것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교리교사는 끊임없는 인내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인내와 친절을 베풀지라도 그들의 곡해가 사라지지 않을 때 산 신앙생활로써 그들을 납득시켜야 될 것이다.
평신도를 통해서 사회와접촉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내와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을 토대로 해서 친절을 베풀고 가르치는 교리가 진실됨을 증명해 주는 산 신앙생활로써 현대를 정화시키고 그리스도 안에 재건해야 될 것이다.
여기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외적 사업인 병원, 학교, 고아원, 기업체, 이런 것들로 일반사회인이 교회의 본 사명이 외적 자선만으로 그치는 줄로 오해하기 쉬운 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외적 사업은 복음을 인간에게 전해주기 위한 환경조성의 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취직할 「찬스」를 제공함으로써 영세를 받게하는 것보다 한 간호원의 신심생활을 목격함으로써 입교하는 것이 훨씬 훌륭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