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독서열이 극히 저조하다는 것은 하나의 중평이다. 그 범주에서 「가톨릭시보」 독자가 제외되지 않았다는 것은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 양상이 조금씩 달라졌다. 희망적인 한 증표는 독자의 대화난인 「디알로그」를 마련한 후부터 나타났다. 의외에도 원고가 쇄도한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우리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적극성을 띠어가는 사태 진전의 한 표증인 것 같다.
반면 거개의 투고자가 저명한 신자들이 아닌 점에 관심이 간다. 문장력이나 표현 등에서 빈약한 것도 있기는 하나 거의 전부를 실은 욕심에서 그중(도착순) 전교활동에 과감해야 겠다는 「자각」들을 제1면에 연재하는 한편 몇편 모아 실었다.
외신은 공의회가 개회 제3주부터 평신도도(성직자와 같이) 「바로 교회이다」는 일대 선언을 하려는 역사적 단계에 있다고 보도했다. (제2면 기사 참조) 평신사도직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받는 고귀한 성소(聖召)이다. 즉 평신도의 의무는 그가 또하나의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대중 속에 옮기는 바로 그것이다. 10월 18일은 (세계전교회주일)이다. 성직자만이 아니고 전 그리스도자(者)가 모두 전교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 다섯 독자는 이 거룩한 사명 완수에 전력을 기울이자고 전국에 제의했다. 『그거야 내가 하지 않아도 딴 사람이 할테지』라는 것이 우리를 설명한 독자의 소리며 『우리의 불친절을 뉘우쳐』야 『수도는 않고 품삵만 아는 신자』인 것이 우리임을 지적하고 반성하자고 제의했다. 우리는 지난 18일 이 중대사명을 자각했어야 옳았다. 아니 분명히 우리는 자각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성우(聖佑)를 빌어 우리의 나약한 단결력이나 협동정신을 보강하고 매진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것이다. (編輯室)
■ 「너무나 큰 선물」 - 馬山 車芳夫 (馬山市 湖洞)
전쟁이란 승리를 전제로 한 적과의 싸움이요 투쟁이라고 한다면 그기엔 반드시 전투원이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비전투원도 얼마든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지금의 사회란 정의보다 불의 선(善) 보다 악(惡), 진(眞)보다 허위(虛僞)가 더 득세하고 자유보다 방종이 더 성행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속단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분이 나설지 모르나 적어도 그것을 감연히 부정하고 나설 인사가 있을지 의문이다. 현세의 교회란 흔히 전투하는 교회라고들 한다.
교회가 전투를 한다함은 앞서 지적한 현실적인 악순환을 멎게하고 「가톨리시즘」 그에 대치 시킨다는 말이 되겠다 (中略) 교우 역시 「전투의 교회」라는 본래의 뜻도 알지 못한채 신앙한다는 궁극의 목적이 구령에 있다고 해서 미사참례나 성로신공 묵주신공 등의 종교적 예식에만 정열을 쏟는 예는 없을까?
혹자는 이런 가톨릭인의 나약성 인간 개인의 능력도 시험해보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심정으로 신공만 드리는 이 병폐를 가톨릭의 숙명이라 하고 중세기 「프로테스탄티즘」의 반기에 소극성을 띤 호교적 방어 태세가 지금껏 개선(改善)되지 않고 고질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평하는 자도 있다.
각설하고 어느본당이든 조직화된 레지오 단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인도 레지오 단원이건 하지만 사실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가장 애를 먹는 것은 이런 전투요원을 그 옛날 「행주」 싸움에서 행주치마로 돌을 나라다 주던 그 성실한 부녀자들 격인 협조단원 선정에 가장 골치를 앓고 있다.
레지오의 행동단원 그것은 교회의 정예(精銳) 용사라야 하고, 협조단원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줄 수 있는 가장 가치있고 보람있는 선물이어야 한다면 금번 추석을 계기로 이렇듯 엄청난 선물을 주신 어느 교우에게 감사해 마지 않는다.
■ 是正해야할 우리의 傳統 - 大邱 張元煥(대구시 수성본당)
일전 어느 다정한 친구를 만나서 환담중 우연히 종교에 대한 대화가 나와 친구를 성당으로 권유했더니 뜻밖에도 그 친구는 성당은 불친절해서 다니지 못할 곳이라고 머리를 흔들면서 내게 이런말을 털어놓았다. 실은 자기도 진작 종교에 다소 관심이 깊어 시내 모 성당의 주일미사에 넉주일 동안이나 참례했다.
그런데 그동안에 전혀 아는체 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안내나 인사하는 사람도 없었다. 예식도 몰라서 눈먼 망아지 요롱소리 따라가는 격으로 참례를 했으나 무미건조하고 마음이 쓸쓸해서 단념했다.
그후부터 수개월 동안 교회에 발을 끊었던 중 이번에는 시내 모 신교 예배당엘 가보았다. 진철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 또한 신자이기 전에 이러한 체험을 직접 맛본 사실이 있고 또 가끔 다른 친구들로부터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 (中略)
확실히 우리 교회의 전교는 프로테스탄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 적극성에 비해서 뒤떨어지고 소극적인 감이 있다. 대중의 심리는 선전에 휩쓸리기 쉬운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들은 이제라도 누구나 없이 전교에 대해 의무감을 가지고 명오가 열리지 않는 외교인의 구령사업에 적극 힘을 기울여야 할 줄 안다.
■ 不親切이 가져오는 것 - 南原 공무택(남원 천주교회)
군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신자 아닌 몇명의 예비신자들을 권고하여 민간교회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그들로부터 교우들의 차고 굳은 인상에 대하여 질문을 받곤 했읍니다. 그럴때마다 그럴듯한 괴변으로 변명했읍니다. 막상 군에서 나와보니 나 또한 차거운 인상의 대열에 들게됨을 느낍니다. 언젠가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종교박해때의 쓰라린 고초와 숨어다니며 전교하던 그 의식적인 무표정이 오늘날까지 전하여 내려오게 되었다고 들었읍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로이 교회를 선양할 수 있는 시대에서 그러한 인습은 당연히 버려야 할 줄 압니다. 굳은 인상보다는 부드러운 웃음으로 무언의 안내보다는 충분한 설득과 이해로써 인도 · 안내함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교리를 알고 신덕을 가지고 입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굳은 인상과 차거운 안내로 인하여 그들이 구령의 대열에 들지 못한다면 우리들에게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늘어나는 關心 · 消極的 活動 - 忠州 宋 누수(충주 야현성당)
이시대에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성교회의 사업중 평신도로 사도직서의 수행을 빼놓을 수 없다.
급격히 증가하는 열화같은 교회밖의 모든 우리의 형제들이 가톨릭을 연구하고 최고한 관시을 가지고 주시하는 이때 우리는 너무나 적은 우리들의 사제가 그들을 안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中略) 교황 비오 11세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제 직무와 거의 비슷한 평신도 사도직에 모든 평신도 역시 부름을 받고 있고 또한 이것은 천주님의 아주 특별한 성총으로 말미암아 된 줄을 잘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마리에 또는 명도회 등의 평신도의 활동은 곧 하나의 훌륭한 사도직인 것이다. 특히 모든 청장년들이 무관심을 버리고 「가톨릭 악숀」에 진력해야 될 줄 안다.
그런데 이렇듯이 중차대한 교회의 요청에 얼마만큼 호응하고 있으며 교회의 어른들은 이 견실한 평신도의 일꾼들을 포용하는 얼마만한 아량이 있을까? 대개는 먹고 할일 없는 청년들이나 교회에 충실할 일이지… 하는 식의 남의 집 이야기 하듯 무관심하고 모든 것을 신부나 수녀들에게 일임한다.
지금은 노소 남녀 구별없이 총동원하여 우리의 천주 우리의 진리를 알려주어야 하고 모든 진리에 굶주린 이들이 우리에게서 참(眞理)을 배우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功利主義와 安逸 - 星州 李 바오로(경북 성주본당)
이제 조용하게 앉아 있을 때는 아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전교활동도 적극적이어야 할 때가 되었다.
현대의 평신자들은 전교활동에 너무나 무관심한 것 같다. 많은 젊은이들이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사도직 단체에 가입하기를 싫어하고 있다. 또한 어느정도 열성있고 교리지식이 있는 분들도 교회의 사도직 단체의 중책을 맡기를 회피하고 있다. 정말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은 싫어하니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만 찾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르는체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우리는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십자가를 피할 때가 아니다. 용감히 일어서서 일해야 할만큼 현실은 바로 눈앞에 직면해 왔다. 지금 교회는 우리 평신자들의 손을 필요로 하고있다.
사제의 수는 너무나 적다. 이 적은 사제들이 골목골목마다 다닐 수 없고 모든 가정을 방문할 수 없다. 평신자들의 조력이 없이는 본당신부는 허수아비와 같은 것이다. 금년 한국천주교 교세통계표에서 본 바와같이 지금 한국의 교우수는 60만을 돌파했다고 하나 이 숫자는 한국의 인구수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수이다. (中略)
우리는 이들을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위하고 우리 형제들의 구령을 위하여 수고하기를 회피하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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