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날때부터 말구유에 누워 세계의 지자인 동방삼왕의 예물과 경배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이 겸비함과 지고의 영광의 동시성 사이에 그 현실성(리아리티)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불합리한 무엇이 있는가… 이는 오히려 현실적인 신비를 간직한채 자연스러운 조화마저 이룬감이다. ▲체스터톤은 수많은 반기독교적 비판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의 배리(背理)를 대략 이렇게 예거하고 있다. 어떤 책이 1장에서 그리스도교는 비관주의라고 증명하고 있는가 하면 2장에서는 낙관주의라고 비난한다. 혹자는 자연에 안주하려는 인간을 향해 별적 눈물과 공포로써 위협한다고 해놓고, 있지도 않는 「섭리」를 내세워 위무하고 마치 유치원 아이를 다루듯 인간을 우롱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한다. 또 이는 남루조식에 혹사(酷使)를 강유(强諭)하는 극기주의라고 비난 받는가 하면 호화 장려한 의식, 값진 성구, 현란한 제의 등 사치의 극치라고 매도당한다. ▲이밖에도 수다한 비평을 열거하고 있더니와 어쨌든 이미 개종 이전에 체스터톤은 이러한 불가지론적 비판의 모순에 대해 강력한 회의를 지닌 나머지 『나는 그들의 비난이 무언가 잘못된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와 행복 그 어느것도 가질 수 없는 인간에게 양자간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재판을 맡길 수는 없지 않는가?』고 했다. ▲이즘, 「노벨」 수상건으로 세계의 각광을 받게된 샤르뜨르를 가리켜 모리약은 『샤르뜨르 같은 자가 되려면 약간의 재능에 사랑이 같은 기질을 타고나면 족하다』고 했다지만 일전 모일간지의 교회에 대한 망론(妄論)은 실로 세상엔 약간의 잔재주에 고양이 같은 기질을 갖고서 무엇이나 잘 할키는 자가 있다는 느낌이다. ▲샤르뜨르는 그 자신이 말하듯 40년간 인류 구원의 절대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지만 결국 절대자(그가 신념한)는 사라졌다면서 『나는 이제 더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술회하여 왕년의 그 부정적 요설의 패기마저 줄어든 느낌이다. ▲교황 요안 23세께서도 역시 『오늘의 세대는 근본적 오류로 인해 침식되고 심각한 무질서에 고민하고 있다.』했으나 곧 사태를 개선할 큰 가능성을 주장했다. 실존주의 모험이나 샤르뜨르의 숙연함(?)이 결과적으로 유일진리에 대한 간접적 증명이 된다고는 느껴볼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