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弱하여 變하기가 쉽다. 그러나 天主님께서는 恒常 愛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勇氣를 求하는 者에게 勇氣, 慰安을 求하는 者에게 慰安을 주셔서 우리를 다시 自己품안에 돌아오게 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신다.』(本文中에서)
사람의 마음은 弱하여 變하기 쉽다. 그러나 天主님께서는 恒常 愛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勇氣를 求하는 者에게 勇氣, 慰安을 求하는 者에게 慰安을 주셔서 우리를 다시 自己품안에 돌아오게 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小學校 1年級時代에 新敎에서 經營하는 學校에 다녔다. 熱心히 믿었다. 其後 서울에서 中學校에 다닐 때에도 每日曜日에는 中央禮拜堂에 나갓다. 日本에 가서도 金澤第四高等學校 2學年時節에 洗禮를 받았다. 그러나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난 後부터는 宗敎生活을 끊었다. 그럭저럭 約30餘年間 信仰生活에서 영영 떠났다.
내가 宗敎生活에 다시 復歸하게된 原因은 5·16 革命 德澤이다. 나는 過去 約10餘年間 野黨生活을 하였다. 5·16 革命 當時는 第5代 民議員에 當選되어 民主黨의 企劃委員에 選出되었다. 5·16 革命이 나자 革命政府는 民主黨의 企劃委員도 逮捕할 方針이었다. 長官들이 逮捕된지 不過1週日 以內에 모두 釋放되었고 내가 들은 情報로는 崔某 林某 黃某 各議員들도 모두 拘束되었다가 不過 5·6日 以內에 釋放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虛報였다.)
나는 1日이라도 速히 辯護士開業을 하기 爲하여 同年6月5日 自首하였다. 當時血壓은 最高 2百 最低 90이었다. 西大門矯導所 獨房에 收監되어 5日이면 釋放될 줄만 알고 5日後부터 내 이름 부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中略)
고록한 내 房에 8월 20日밤 11時쯤 玄某氏와 _某社長이 들어왔다. 나는 정말 반가왔다. (中略)
나는 血壓이 높아서 每日 누워있었다. 그러나 두분들과 이야기도 하고 또 玄氏는 많은 讀書를 하신 분이라 이야기를 잘하셨다. 流行歌도 몇個 알고 계셨다. 每日 자고나면 流行歌工夫, 이야기 등으로 참 滋味있게 보내었다. 그러나 이것도 不過 20日 동안이다. (中略)
家族面會는 한번도 없으니 어린 兒孩들이 어떻게 生活하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없다.
생각하면 어린 아해들이 불쌍하고 내 妻에 대하여 未安하다는 마음 뿐이다.
이렇게 憂鬱한 生活이 繼續됨으로 나의 精神은 漸漸 精神分裂症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나도 이 苦痛을 잊어버리는 方法은 죽는 길 뿐이다는 생각이 間或 든다.
그러나 自殺은 예수敎에서 罪惡이 된다.
또 내 家族드에게 累를 끼친다.
또 나에게 親切하게 해주는 看手들이 責任을 지게된다는 등등으로 決行을 못하였다. 그러나 自殺의 道具가 될 수 잇는 원기소 __은 늘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이 孤獨하고 苦痛스러운 가운데서 비로소 일어서서 天井을 바라보고 天主經을 소리높이 외웠다. 一間半房을 돌아다니면서 외운다. 이렇게 하면 나의 憂鬱한 마음이 多少 가라앉는다. 또 祈禱를 드리기 시작했다. 나를 빨리 釋放시켜 주시고 내 妻와 아해들이 모두 武事히 있게 해주십시요 하는 祈禱를. 間或 밤에 잠이 깨이면 모두 집안 家族 생각이 든다. 내 아해들이 참 불쌍하고 내 妻가 참 不幸하다는 생각이. 이럴때면 나는 누워서 天主經을 繼續 외움으로써 家族에 대한 근심을 天主님께 맡기기로 했다. 이렇게 祈禱를 딀고 天主經을 외우는 것이 每日 數十番式 繼續되었다. 이것으로 나도 마음의 慰安과 平和를 얻었다. 내 監房 바로 앞 房에 계시는 某將星도 木沈을 冊床 삼아 그 위에 聖經冊을 놓고 工夫하는 것이 時時로 엿보였다.
이와같이 고독하고 숨막히는 할우하루이 生活의 苦痛中에서 結局 天主님을 부르고 또한 그 救援을 哀願하게 된다.
約30年間 天主님의 옆을 떠났으나 天主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에게 慰安을 주셨다. 나같은 것을 다시 당신의 子息으로 삼으시려고 징계의 채찍을 주셔서 다시 天主님 앞으로 引導해 주셨다. 나는 4個月만에 釋放되었다.
그後 처음에는 永樂敎會에 每日曜日 禮拜보러 나갔다. 約2·3個月 다녔다. 그러나 牧師님들의 소리높여 祈禱하는 것이 내마음에 어쩐지 滿足할 수 없었다. 熱과 힘은 한번 소리높여 외치면 熱이 식고 힘이 줄어드는 것 같이 생각이 든다.
내 妻는 日新敎會에 다녔다. 其信徒들이 每週金曜日이면 敎人들 家庭을 祝福하기 爲하여 모임을 가졋다. 家庭的 雰圍氣가 있어서 매우 좋은 줄 안다.
그러나 나는 其敎人들이 大衆 앞에서 소리높이 祈禱하는 것은 贊成할 수 없었다.
其祈禱의 참된 眞價를 發揮하는 熱과 힘은 이미 減少되어 形式化된다고 생각되었다. 天主敎에서는 每日 미사를 드린다.
默默히 드린다. 이 말없는 祭祀로 마음 속 깊이 우리 罪科를 뉘우치게 하고 그 거룩한 죽음을 回想하게되어 예수님의 無限하신 사랑을 느끼며 더욱 懇望하게 한다.
이 点이 내가 改宗한 하나의 動機이다.
新敎에서는 分裂이 있다. 한 敎會에서도 敎人들끼리 不和한데가 있다고 한다. 나는 分裂을 싫어하며 派爭을 싫어한다. 天主敎에서는 派爭도 없고 分裂도 없다.
敎友들은 어떤 敎區이건 區別할 것 없이 모두 親密感을 느낀다.
이 点이 내가 天主敎를 擇하게 된 第二의 動機이다. 그러므로 나는 天主敎를 擇하여 信仰生活에 復歸할 것을 決心하였다. 나의 이 決心을 實現시켜주신 玄錫虎씨와 나를 잘 指導해주신 故 曺元煥 先生님께 마음 속 깊이 感謝를 드리는 바입니다.
筆者略歷
本籍 慶南咸安郡 鳳城洞 931
住所 서울特別市 中區 會賢洞1가 148의5
學歷 및 經歷
日本 京都帝大 法學部 卒業
日帝時 高等文官試驗 司法·行政 合格
美軍政 警務部 次官
現在 監査院 監査委員
1963年 9月 19日 領洗
1964年 4月 17日 堅振
韓鍾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