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歐美)를 유력(遊歷)한자는 그곳의 공원같이 아름다운 공동묘지를 발견할 것이다. 또 그런 곳이 명소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네들은 높이 첩첩이 쌓는 것과 같이 깊이 첩첩이 묻는다. 그러니까 묘지의 몇간의 공간이 한 가족 묘이다. 우리들은 설 땅이 없어서 가족계획을 해야겠다고 하니 우리나라 풍속과 망령에게 실례가 안된다면 저들처럼 먼저 「공동묘지가족계획」부터 시작해 봄이 어떨까. 그곳에서도 우리처럼 추사이망날 성묘한다. 그날 번돈만으로 꽃장사는 한해 겨울을 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묘비는 거의 일률적으로 ○○지묘(之墓)로 무미건조한데, 저들의 묘비는 경견한 것, 시적인 것 그리운 것 가지가지가 있다. 그곳은 산책하면서 여러 묘비를 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 이런 것이 있다. 『두번 죽으나 한번 묻힌다.』 우리의 뇌리에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이 거래하고 이 짧은 비문의 뜻이 우리 마음에 육박한다. 우리의 일생의 마지막 날 심장의 고동이 그치는 순간, 그것은 창백한 죽음이다. 그러면 인간은 나면 한번 이상 죽을 수 있을까? ▲오늘 우리 심장이 뛰는 동안 지상의 일체의 욕구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두번이고 세번이고 죽을 수 있다. 일생의 마지막 날, 마지못해 이 지상의 모든 것을 버리기로 강요되기 전에 스스로 나아가서 오늘 지상의 일체의 사묙을 버리는 것이 바로 「죽음」이 아니고 무엇일까. 건강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그날 그날 심신의 단련에 있다면 선종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그날 그날 자기에게 죽는 것이 아닐까. 우리마음 속에는 주님의 말씀이 들릴 것이다. 『인자가 어느 시에 올는지 알지 못하는 즉 예비하고 있으라 주인이 돌아올 때에 수직하는 종을 만나면 그 종이 복되리로다.』 ▲또 걸아가본다. 발길을 멈추게 하는 또 하나의 묘비가 나타났다. 그것은 고인(故人) 의덕을 찬양하기 위해 새겨진 것이다. 『그는 죽음을 맞이해서 낭패함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과 「죽음」과 친교를 맺는 자는 그 임종의 날을 당하여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이달은 연령을 특히 기억하는 달이다. 우리보다 먼저간 그들은 이러한 묘비에 새겨진 말대로 착히 살았으리라. 그러나 천당은 넓으나 천당으로 가는 길은 좁아서 아직도 도중에서 단련을 계속하는 연령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