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히 퇴폐일로에 있는 이나라 도덕생활은 비단 청소년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괴로운 현실 속에서 바라보는 유일한 희망이 이 나라의 앞날을 맡을 청소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뉘없이 모두 청소년을 통하여 국가 장래를 내다보는데 특히 관심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애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는 그 깜한 눈동자 속에서 내일의 행복을 꿈꾸고 젊은이들의 의젓한 모습을 바라보는 노안(老眼)에는 흐뭇한 행복의 눈물이 고인다. 그런데 과연 이나라 청소년에 대한 우리의 전망은 어떠한가.
도적도 제 아들에게는 선(善)을 가르친다. 모순이라기에 앞서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인간에서 선성(善性)이 없었던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의 가치판단도 없이 인간사회는 이미 악의 도가니속에서 멸망한지 오래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 청소년을 선도하여 내일의 번영과 행복을 걸고자 하는 마음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반성하고 청소년 선도에 어떤 일을 해왔는가.
그에 찬 힘으로 강압적(强壓的) 단속에 나서고 청소년 풍기단속 강조주간을 설정하여 거리마다 「플래카아드」를 내걸고 가슴마다 패장(佩章)을 차고 다채로운 행사를 하는 등이 그 전부였던가. 정부는 교육자를 문책(問責)하고 교육자는 연석회의를 열고 교사를 거리에 풀어 극장과 유흥지를 단속하고 출입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위반자를 퇴학시키는 것이 그 전부로 알지나 않았던가.
청소년의 풍기는 원래 법률이나 단속의 대상이 아니고 선도의 대상이다. 더구나 이 나라 오늘의 청소년의 가슴 속을 들여다 볼 때에는 그 우매(愚昧)한 대책에 실소(失笑)하지 않을 수 없다. 기성세대를 불신하고 공서양속(公序良俗)을 구역질 나는 전통이라고 하여 춤뱉고 집을 나간 부랑아(浮浪兒)에게 아버지의 권위와 주먹이 무슨 보람을 주겠는가. 새것과 변화를 찾아 스스로를 소모하는 젊은이에게 권태(倦怠)의 상징으로 밖에 뵈지 않는 기존 질서가 무슨 큰 구실을 하겠는가.
청소년을 움직이는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이다. 그 사나운 반항과 충천하는 기세도 사랑앞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다. 젊은이는 사랑을 찾는다. 그 앞에는 모든 것을 바치고도 아까운 줄을 모른다. 이것이야 말로 젊은이의 특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식을 저주하는 부모 앞이나 젊은이를 매질하는 사회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다름질 친다.
풍기는 도덕 생활의 표현이다. 도덕은 내심(內心)으로 복종하는 인간의 생활규범이다. 그래서 도덕을 자발적규범(自發的規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도덕에도 교육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이 교육은 자발적 심소(心素)의 교육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움직임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젊은이의 마음은 사랑없이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에는 거의 맹종적(盲從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막스 웨버는 유럽사람들이 도덕과 법을 잘 지키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치는 종교교육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곧 사랑의 교육을 의미한다. 가장 큰 사랑의 교육은 사랑의 극치(極致)인 그리스도의 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나라의 도덕생활을 올바르게 일으킬 수 있는 힘은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있다. 더구나 타락된 청소년의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데는 그리스도의 교육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정부와 교육당국은 청소년의 도덕교육에 획기적인 반성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그 마음을 파고드는 사랑의 교육을 본질로 하는 종교교육에 큰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이나라의 사회도덕과 특히 청소년의 풍기를 선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