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이 지난지도 오래다. 포도위엔 「프라타나스」 전해진 연서처럼 서글피 쌓인다. 들길에 서면 가을의 마지막 이삿짐 같은 누런 볏가리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벼그루만 남은 창백한 들판엔 보리갈이 하는 농부가 황소를 모는 뒤에 흙덩이깨는 수건쓴 아낙네가 시름겹다. ▲어느듯 지겹도록 길어진 밤, 귀를 모으면 들려오던 귀뛰라미 소리조차 소식도 없이 가을을 따라가버린, 초겨울 밤은 더욱 적요하기만 하다. ▲그래서 초가을에 다녀간 봉쇄수녀원의 늙은 서양신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 수녀원엔 요새 기구많이 합니다. 여럿이 많이 모여 밤새도록 합니다.』 거긴 불과 십여명 남짓한 수녀들이 있다는데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모여 밤새워 기도하는가 의아해 하자, 그는 희극배우처럼 음성과 표정을 가다듬어 『걸리에』(고음으로 귀뚜라미 소리) 『에레이슨』(저음으로 개구리소이) 『갈리애』 『엘레이슨』 하는 것이었다. ▲「스테인드 그라스」에 황홀한 성모의 승천하는 자태, 그아래 황국(黃菊)으로 만개된 가을의 제대를 바라서면 마음은 자못 계절처럼 흐뭇하다. 그러한 뒷덜미 저 높은 곳에서 들려 오는 합창은 어쩌면 이 경건한 미사와는 그렇게도 소원하고 불화한 느낌일까. 차라리 소박한 자연의 벌레소리가 보다 나은 찬미일 것이다. ▲이즘 소위 젊은 지성층은 근대적 개인주의 의식에 선지 교회에 대한 공동의식 내지 봉사심이 희박하다. 반면 일부 선의의 교우들 또한 교회의 기성관념인 초자연적 만능락(萬能樂)에 만성(慢性) 되어 현실에 소극적이며 안일한 자세이다. ▲바야흐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 공의회늰 교회자체의 쇄신과 현대세계와의 대화를 촉구하는 한편 교회가 살아있는 이 시대에 대해 구원(救援)의 공동의식을 지니고 현실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기적 안위는 교회의 가르침은 물론이요 시대의식에도 역행하는 행위가 아닌가. ▲이점, 비단 대내적인 활동뿐 아니라 교회는 대외적으로 제반 활동(특히 문화행사)에서 종래에 나타낸 타단체에 비한 그 후진성을 시급히 자각하고 분발해야 할 줄 안다. ▲성탄이 다가온다. 올해도 예년 같은 대외행사를 기대할 수 있다면 좀더 창의작이요 세련된 기량으로써 밖으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선양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알뜰한 마련이 있기를 부탁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