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術이 갈다지만 人生 또한 결코 짧지는 않은 것이다.
勿論 永遠의 無限에 비긴다면 百歲를 넘지 못하는 이 生은 滄海의 一粟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中略)
그런데 人間을 單位로 본다면 生命이란 絶對的이다. 『그 變天地도 一_을 못가지만 그 變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物」과 「내」가 無窮하다.』는 것은 永久한 天地보다도 白衣같던 것이 곧 蒼狗로 變하는 구름을 보고 自身의 굳은 人生觀을 말한 것이지만 臆測이 아닌상 싶다. 주어진 人生을 사는 方法에도 가지가지가 있을 것이다.
或은 醉生夢死 하는 이들 或은 修道僧으로 或은 高樹에 앉아서 日을 마치며 淸泉에 _하여 自潔하는 避世人 或은 먹고살기 爲하여 晝夜로 東奔하는 市井人 等! 따라서 죽음이란 此岸과 피안의 交叉路에 서게될 때까지 人生航路의 「키」를 어느쪽으로 잡느냐는 個人의 世界觀이 問題이다. 그러나 多樣한 生의 「코스」를 規定지우는 커다란 要所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有無임이 틀림없다. 파스칼의 말을 빌릴 必要도 없이 생각하는 機能을 최대의 武器로 삼는 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믿음」은 커다란 寄與를 한다. 「믿음」… 즉 「信仰」이 우리에게 큰 意義를 갖는 것은 『나는 不完全하다』는 自意識에서 싹튼다고 볼 수 있다.
나는 1963年 9月 以前엔 宗敎를 信仰해온 일이 없었으니 이제 改宗이라고 한다면 處女의 結婚을 再婚이라고 함과 같으나 實質的 主觀的으로 보면 큰 改宗이니 이를테면 正式으로 結婚을 하지 않았지만 實質的으로는 總角과 同居生活을 하였는데 그것도 짧은 期間이 아니고 幼年부터 自動的으로 近60年間 해온 것이다. 그러면 一_도 떠나지 못하던 愛敬의 對象인 「님」은 누구였던가? 이런 말은 孔子를 비롯한 여러 聖賢에 對한 侮辱임이 틀림없으나 이것은 一種의 隱喩的表現에 지내지 않는다는 見地에서 自責과 自慰를 하는 바이다. 即 儒敎中에도 宋代의 性理學이 늦게 播及된 西北地方의 封建的家庭에서 자라났으므로 中國의 孔 · 孟 · 程 · 朱와 그 系統을 이어받은 李朝의 靜 退栗沙尤의 五賢을 無條件崇仰하였다.
(中略)
이런 環境에서 자라오던 中 時代의 變遷으로 因하여 여러가지 試鍊을 겪었으니 첫째것이 即 斷髮다. 우리나라의 開化에 따라 내린 斷髮改服令에 對하여 「吾頭는 可_이라도 吾髮은 不可斷」이라고 百折不屈인 柳毅암 先生의 敎訓을 받들며 그 崇高한 이에 私淑하여 滿洲地方에 갔다가 病으로 因하여 歸國한 朽 入院하고 手術을 받기 爲하여 痲醉藥을 먹고 數十時間을 昏睡狀態에 빠졋다가 깨어나서 僧여가 된 自身을 發見하고 長太息을 禁치 못하였으나 『아는 것이 힘이라』는 南崗先生의 敎諭에 따라 新學을 工夫하면서도 「孝의 始」를 지키지 못함을 恒常自責하였다. 더구나 宗敎에 對하여는 毅암先生과 같이 性理學에 精通하면서 殉國한 崔勉암 先生에 同調(中略)… 다른 宗敎란 꿈에도 생각지 목하였던 것이다. 그런 人生觀을 가지고 있던 愚夫가 무슨 理由로 다른 宗敎 特히 天主敎를 믿게되었을까? 여기 대해서는 于先 儒敎의 宗敎性 如否와 宗敎 特히 天主敎의 本質을 解明하여야 할 것이지만 紙面關係가 있을 뿐 아니라 모든 學者나 信徒가 다 아는 바이니 新入生으로서 不能함은 勿論이고 또 蛇足을 그릴 必要도 없으므로 省略하고 다만 儒敎는 現實에 置重하기 대문에 學術的 見地에서 宗敎로 보지 않음이 妥當하다는 通常的 見解에 따를 뿐이다.
그러나 이 点을 口實로 改宗이 아니라는 것을 辯明하려는 것도 아님과 아울러 단발하던 때와 같이 歎悔하는 것도 아니고 內心으로는 늦으나마 하나님께서 주신 機會를 얻었다는 快感을 가지는 同時에 義務履行에 對한 송구를 禁치 못하는 바이다. 現在의 世態로 보아 洛東江 錦江 漢江이 「三강」이고 「스피어다이아」가 붙은 車가 「五倫」이 된 이때에 儒敎란 名稱조차 알기 어렵게 되었고 民主政治의 基盤인 政黨의 現實을 보면 李朝黨爭의 怒惡을 뼈저리게 느끼는데 그 黨爭의 原因은 大部分이 名利慾에서 나온 것은 勿論이지만 學術論에서 發生한 것도 없지 않으니 君主萬能이었던 그 時代에 王室의 服制 때문에 생긴 것이 그 一例인데 儒敎에도 黨派가 있었음은 文章家인 蘇東坡 性理學者인 程伊川 三禮와 春秋에 造詣가 깊은 劉摯가 領導하는 宋의 獨黨 洛黨 및 朔黨이 있었음은 歷史가 證明하는 것이다.
高麗가 「興於佛 亡於佛」하였음은 世論인데 李朝에 이르러서는 「佛」代身에 「儒」를 쓰는 極端論者도 있다. 한편 天主敎는 오랜 傳統을 지니고 있어서 世界에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派閥問題가 없으니 眞心으로 天을 崇仰함으로써 人間다운 生活을 하려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勿論 儒敎의 衰退는 그 原因이 儒敎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고 客觀的 條件인 時代의 潮流 때문이었고 또 表示는 類似하나 內容이 全혀 다른 오늘의 政黨을 李朝時代의 黨派와 聯結시킨다는 것은 言語道斷이고 더구나 黨爭의 原因을 봄에 있어서 10分之2 밖에 되지 않는 學說問題를 云云하는 것은 吹毛覔疵라고도 볼 수 있으나 政敎一體였던 君主時代에 唯一한 原動力으로서의 使命과 惠澤을 妄却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後進性을 儒敎에 轉嫁시키는 것도 아니며 다만 客觀的 情勢를 말하는 것이며 基督敎에도 天主敎 外에 新敎에 여러 派 있으니 비약的 發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家族生活에 있어서 九世同居의 秘訣인 百忍의 效力이 여기에도 發生하였으면 畵龍点睛이 될 것이지만 그것을 旦置하고 斷片的인 愚見을 들면 첫째 「天」이니 「天은 至高無上이고」 또 「百神의 君」이며 그 生育의 功으로 因하여 帝라고도 함으로 『天을 順하는 者는 在하고 天을 逆하는 者는 亡한다』는 것과 潜心以居하여 上帝를 對越한다』는 格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입에 침이 말으로록 읽으면서도 現實的으로 惡한 일을 하거나 남을 害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自尊心과 安堵感의 捕虜生活을 한데 切實히 反省하면서 앞으로는 天主를 섬김에 있어서 보다 積極的이고 名보다 實이 앞서기를 다시 다짐하는 바이다.
다음은 여러가지 問題가 있지만 그中에 가장 重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先祖에 드리는 祭祀 彌撒 드리는 節次問題 이 社會의 惡의 盛行問題 및 復活問題 等에 關하여 愚見을 披瀝하여 敎諭을 받아야 할 것이나 紙面關係로 省略하고 다만 이번에 領導하여 주신 여러분 가운데 特히 故 六堂 先生과 曺 요완 會長 두 분의 誘導에 對하여 一言하면 恩師와 같이 모시던 博學 特히 史學에 精通하시며 獨立宣言文의 起案者인 六堂 先生이 領洗를 받으신데 對하여는 風雨와 遠近을 가리지 않고 誨諭에 熱中함으로써 梁의 高僧인 生公을 聯想케 하는 同時에 自身이 지니던 妄想에 對하여 眞心으로 悔改하는 바이다.
(中略) 오뚜기는 아무렇게 내던져도 곧 바로 선다. 이는 오뚜기 밑 部分에 쇠로 만든 重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믿음」이란 굳건한 重心의 所有者는 언제 어디서 어떤 環境에 處하건 간에 自己의 處身할 道理를 찾는 것이다. 「믿음」이 人生을 支配하는 머릿돌이 된다는 것을 認定한다면 結局 一切의 矛盾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오늘의 神話는 「믿음」으로서만 解決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妄言多謝
筆者經歷
1933·3·日本 京都大學部 (英法科) 卒業
1933·11·日本 高等文官試驗 司法科 合格
1934·11·日本 高等文官試驗 行政科 合格
1946·9·서울地院 判事
1956·4·國民大學長 署理
朴이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