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범죄를 중심으로 하는 연소자들의 각종 비행의 급격한 증가와 아울러 그들의 풍기문제는 오늘날 한국이 지닌 또 하나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들은 나라의 보배라고도 하고 또 장래에 「천주의 백성」을 영도하고 교회의 앞날을 맡을 역군이 그들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청소년의 풍조를 바른 궤도에 올려 놓는데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비행의 증가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현하의 세계적인 경향이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가령 행정당국이 발표한 소년풍기단속 숫자를 보면 1962년에 51,739건을 기준으로 하여 그 2년 후인 1964년 10월 현재에 벌써 129,670건을 단속하여 실로 250%의 급격한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풍기 단속에 불과한 것이고 청소년의 범죄 및 비행에 이르러서는 숫자의 증가는 고사하고 행위의 악질화, 집단화, 누범소년(累犯少年)의 증가, 연소소년의 증가 및 중류가정범죄소년의 증가 등을 그 특색으로 들고 있는데 우리의 관심과 우려가 더욱 더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외국을 보면, 최근 10년간 공산국가들은 소년범죄율이 감소되어, 가령 불가리아에서는 10분지1로 감소되었다고 보도하고 있으나 그 사실여부는 알 길이 없다.
설혹 범죄율은 감소되었다고 하더라도 선량한 청소년이 증가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복지국가(福祉國家)의 이상(理想)이 거의 실현된 스웨덴, 덴마르크, 영국 같은 나라에서도 역시 청소년의 비행이 중대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크로즈‧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소자 비행의 원인을 경제적 빈곤에 두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이 길은 바른 이론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잘사는 나라에서도 소년비행의 숫자는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본의 예가 잘 말해 주고 있다.) 또 사회환경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점은 우선 수긍되는 견해다. 오늘날 성인(成人) 사회를 보라. 성인사회의 타락, 안일, 자극 등을 방치해두고 연소자들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논법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먼저 성인 사회부터 그 생활을 반성하고 정화(淨化) 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혹은 권위(權威)의 실추(失墜)를 들어 그 원인이라고도 한다.
즉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 예컨대 프로테스탄 국가들, 혹은 정부의 권위, 경찰관들의 권위, 교사들의 권위, 부모들의 권위들이 실추된 곳에 소년비행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분석들을 들어보면 대체로 가정교육의 결함, 학교교육의 결함, 사회환경의 혼탁 등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이상 심리학자(異常心理學者) 정신병리학자(精神病理學者) 혹은 소년심판원의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비행소년들의 공통적인 성격은 폭발성(爆發性), 자기현시성(自己顯示性), 즉행성(卽行性) 들이라고 한다. 즉 첫째, 그들은 어떤 충동에 대한 억제력(抑制力)과 인내력이 결연된 것이다. 둘째 인간적인 애정의 결핍, 셋째 판단력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청소년들의 이러한 성격은 일단 굳어지면 바로 잡기란 실로 극난한 과업으로 경찰의 취체나 단속만으로는 그 근본원인을 시정할 수 없다. 여기에 올바른 가정교육이 요청된다. 자녀들의 가정교육의 방법을 설명하려면 「가나」촌의 성요셉의 가정, 즉 성가정을 들면 될 것이다. 요셉의 성가정은 부성적(父性的)인 것과 모성적인 것이 가장 조화된, 가정교육의 모범적인 도장, 무풍지대라 하겠다. 억제력의 결여를 나누어 첫째 우리 주변에 많은 가정이 모성적(母性的)인 과잉보호, 과잉애정을 발휘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나약한 무저항아동을 만들어 놓을 때, 또 부모들은 무진한 고역을 하면서도 자녀들은 안일한 생활을 허용하여 오히려 자랑으로 삼고 있을 때, 요셉은 근로교육을 했고, 기술을 가르쳐 생활에 무위(無爲) 할 여가를 없이했고 묵묵한 가운데 「유모어」 마저 깃들인 착한 아버지, 크고 작고간, 매사에 생활의 지침을 지시하는 형제적인 역할 가운데도 엄연한 부성적인 권위가 풍겼던 것이다.
둘째로, 억제력의 결핍은 고독에 대한 인내력을 상실케 한다. 우리 주변의 많은 가정이 부정적인 권위만으로 아동교육이 잘되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엄격히 다스리는 것만으로 능사로 삼는 수가 많다. 아동들은 차차 부성적인 것을 기피하게 될 때 어머니는 성당일이 바쁘다, 생활에 바쁘다는 이유, 회합에 가야된다는 핑계 등으로 가정을 방치하여 아동들을 고독하게 버려둘 때, 요셉의 성가정에서는 착한 아내 마리아가 가장인 요셉을 공경하고, 아들 예수의 미묘한 일거수일투족을 애정의 눈으로 관찰하고 보살펴 주는 것이다. 자식의 마음은 무언 중에도 모성(母性)이 제일 잘 아는 것이다. 성모는 그 아들을 인간적인 「깊은 이해」와 종교적인 「높은 이해」로 보살피며 곁에 있었던 것이다.
청소년의 올바른 지도는 사회의 최저 단위인 가정에서 성가정처럼 부성적인 권위와 모성적인 사랑이 완전히 조화된 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학교교육의 비정상 중, 특히 교사들의 과오를 들 수밖에 없다. 교사들의 사생활, 제도의 결함, 경제문제 등 그 원인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상식화된 문제를 재론할 필요는 없거니와 교사들 역시 부성적인 것과 모성적인 것을 그 교육행위 가운데 조화시켜야 하겠다. 제자들의 잘못을 볼 때 무사주의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권유하여 판단력을 훈련해야 한다. 동시에 모성적인 사랑이 항상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권위와 사랑이 융화된 곳에 올바른 교사의 길이 있는 것이다. 청소년의 선도는 가정과 교사가 「혈맥을 통한」 인간 교육에 그 핵심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