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기적을 낳는다』는 것은 어느 영화제목 인듯하다. 주제(主題)와는 관계없이 그 사랑의 성질을 「아가페」적인 것으로 돌려놓고 볼 때 역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흔히 좀 배웠다고하는 교우들 중에도 갈라진 형제들을 대할 때 선입견적으로 무시하는 말투와 독선적 허세(?)를 취함으로써 그들의 감정을 은근히 상하게 만들어 놓기가 일쑤인 것 같다. 극히 예외적인 것이긴 하겠지만 개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지않아 있다. 즉 『당신은 아무리 잘해도 천당가긴 예전에 글렀소』라고…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악담도 이 보다 더한 악담이 또 있을지조차 의문이겠지만 도대체 이런 말을 하는 자기는 천당에 꼭 간다는 확증을 어디서 받았는지…? 여하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오늘날 중대시되고 있는 「에꾸메니칼」 정신에도 어긋나거니와 의리(義理)에도 그릇된 편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말안해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프로테스탄이라 해서 예외없이 구령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가톨릭신자라해서 무조건 천당간다는 어리석은 소리리도 하지 않는다. 『주여, 주여하는 이 마다 다 천국에 물어가지 아니하고…』(마‧7‧21) 주께서도 밝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가 갈라진 형제들과의 화목보다는 불목이 논쟁으로써 더 많이 꾸며져 있다는 것을 솔직히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싸움의 시대가 아니다. 현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평화적 참신한 대화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정통신앙이나 신조(信條)가 일보라도 영보되거나 흐려져서는 안된다. 오로지 우리는 보다 너그러운 이해와 아량을 가지고서 지나친 선입견적 아집(我執)이나 형식에 치우친 낡은 사상을 버리고 갈라진 형제들을 다시 우리의 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며 놓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편협함이 없는 사랑의 대화로써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교리나 교의를 논박하기에 앞서, 그들을 먼저 한 형제로서 대접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애호와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현시대가 요구하는 호교(護敎)의 첫 자세로서 갈가진 형제들의 그릇된 길을 본래의 궤도로 인도해주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金忠洙(경기도 파주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