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만에 다시 돌아보는 성로십사처, 그 앞앞이 무릎을 꿇으면 무언가 인자(人子)로서의 예수님의 슬픈 노정(路程)에 애듯한 정회를 금할 수 없다. 『우리모(母)여 간구하니 내 맘 속에 주의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그의 신으로서의 영광 앞에서 보다 인간 고난의 상징인 이 길에서의 슬픈 해후는 주께 대한 더 뜨거운 향수를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어느 만큼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의 주의 지난날의 슬픔을 그 가슴속에 현현(顯現) 할 수 있을 것인가? 주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인간의 최후의 노정(路程)까지 가셨다. 그는 가장 비천한 여인의 심경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이해와 공명을 함으로써 그 치욕으로부터 건져주셨다. ▲간특한 무리에 둘러싸여 막다른 길에선 여인이 핍박을 당할 때 그 무리들로 하여금 한마디의 항변의 여지조차없이 쫓아버린 그의 현철한 처사는 결코 그 고매한 이지(理智)에만 있지 않다. 그는 죄녀와 꼭 같은 인간의 고뇌를 이해하고 감지하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절실한 사랑 때문에 그녀를 해방하고 구원하신다. ▲그는 모든 체면있는 인간이 백주에 대하기 조차 꺼리는 여인의 대접을 기꺼이 받으셨다. 눈물을 흘리며 향수를 부어 주의 때묻은 발을 자신의 머리체로 씻는, 이 너무나 극적인 장면은 세상 상식으로는 오히려 어색할지도모를, 그녀 나름의 이러한 소박한 사랑의 표현마저 주께서는 태연자약하게 또한 진지하게 가납하심으로써 이를 조화시키시고 그 죄녀의 사랑을 승화시키신다. ▲우리는 주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뿐 아니라 이러한 인간을 초월하지 않는, 어쩌면 인간에게도 구해볼 수 있을, 그러나 인간 극치의 자세에서 더 친밀한 주께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인간의 사랑은 어느 만큼 진전하다가도 어느 결정적인 기로에선 감정의 타산이나 이기적인 자존에 직면하고 만다. 그리하여 많은 나약한 심령이 그러한 결정적인순간에 한숨의 따뜻한 연민을 못얻고 어쩔 수 없는 그 감정의 장벽에 막혀 오한(惡寒)을 느끼는 수가 허다하다. ▲실로 인간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무엇을 줄 수 있느냐에 앞서 어느 만큼 인간 개개의 애상(哀傷)을 진정으로 공감하느냐에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