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공보부에서는 뜻밖에도 본사에 공문을 보내왔다. 내용인 즉 종교를 가장하여 침입하여오는 공산당의 간접침략을 경계하고 유사(類似) 성경이나 종교의 사실이 있으면 보고해 달라는 것이다.
동 공문에는 유사 성경과 성화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산 측의 간접침략의 사실을 알리고 여기에 의혹되지 않도록 공산주의자들이 선전 살포하는 거짓 성경과 성화의 전시회까지 열린일이 있었다.
하기야 이런 것이 뜻밖의 일도 아니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원조가 죄를 범하자 그들의 자손 카인과 아벨이 서로 맞서 싸운 싸움의 역사는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오늘날처럼 심각한 「이데오르기」 투쟁은 일찌기 없었던 것 같다.
성경에도 거짓선지자를 조심하라고 했고 양의 가죽을 걸친 이리떼를 조심하라고 하신 경계의 말씀이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이것이 오늘 우리 주위에서 현실화 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번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일찌기 없었던 새로운 술책을 쓰고 있다. 감쪽같이 「성 마테오복음」이니 「요왕복음」이니 하는 「렛텔」을 붙이고는 그 속에 붉은 가시를 박아두고 선남선녀들을 현혹하고 있다. 성경이라고 해서 다 읽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의 술책과 묘책에 못지않게 정신적인 무장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때 아닌 거짓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우리의 정신을 흔들고 있는 이때 우리는 더 한층 계시의 말씀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영혼의 투구를 써야겠다. 공산주의자들은 앞으로도 어떠한 비상한 방법을 들고 나올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영혼이 멍들어가고는 있지 않는지 스스로 반성해보자. 원수들의 책동에 흔들리지 않을 영혼의 무장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자.
어린이들이 시각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본성이다. 요즈음 골목 골목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만화가게는 언제나 어린이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먼저 들리는 곳이 만화가게 이다. 심지어 어떤 어린이들은 학교수업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만화책을 보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모든 용돈을 만화를 보는데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어린이들의 만화 독서 의욕을 꾸짖자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의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악독한 만화상인들로 인하여 벌써 어린 새싹의 영혼을 좀먹어가는 건전하지 못한 만화들이 너무나 많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다.
만화가 어린이들의 유일한 벗이라면 그 내용이 건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상 좋지 못한 만화를 통해서 많은 어린이가 크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일이 허다하다.
이 달은 「소년 소녀선도의 달」이다. 당국은 어찌하여 어린이들의 악한 벗인 만화 악독 상인들을 통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불량 소년 소녀를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않는 한 「소년 소녀의 선도」는 구호에 끝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 말하고 싶다. 산상의 등불이 되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가톨릭은 왜 이런 악독한 만화에 대해서 아예 관심조차 없단 말인가? 좋은 것을 내어 놓치 않고 악한 것을 밀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좀 더 건전한 만화를 만들어 새싹을 좀먹는 만화를 일소하고자 하는 가톨릭인의 만화가가 있어야겠다. 어릴 때 박혀지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죽는날까지 그 영혼 안에서 힘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만화를 그린다면 신구약에서 얼마든지 많은 소재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결코 공론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우리는 가톨릭인의 만화가를 아쉬워한다. 평신도 사도직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린이의 마음을 파고들어가는 만화가로서의 평신도 사도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다른 하나의 그리스도의 사도를 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