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무엇인가 산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은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보람을 미치려고 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흔히 사람은 제각기 맡은 바 직책 자체에서, 또는 그 과정에서 완전하고 충실하다 할지라도 그가 이행하고 있는 그 일의 궁극적 목적을 그대로 생활화하고 실천 하기란 진정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필생의 업을 인생탐미(耽美)에 두지만 과연 그가 예술작업 아닌 그 자신의 실생활에까지 탐미적 자세를 견지하기 힘들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현대인은 인간 자신을 위해서 보다는 사상이나 관념자체를 위해서, 직업 자체를 위해서, 심지어는 물질 자체를 위해서 살아가는 목적의식이 전도된 비극에 빠져있는게 아닌가 싶다. ▲더구나 기계문명의 지배 속에 있는 현대인은 자아를 상실한 언제나 직업의식에 얽매어 때묻고, 그것은 외면적으로도 그 직업에 고착된 독특한 태(態)와 냄새를 풍기기까지 이른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인가 인간개성의 유지, 인간본연의 자세유지를 위해 그 직업에 예속되지 않는, 그것은 하나의 생의 수단에 불과할뿐이어서, 그 현실 위치에서도 때로는 초연해질 수 있는 순수성을 견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죽음을 가계 각층에서 중심으로 애도해 마지않는 고 김홍섭 판사의 많은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인생수단(직업)을 탈피한 그의 초연한 지기(志氣)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어느 시골 「버스」간에서 순경의 검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촌민들 사이에 끼어 앉은 그의 너무나 법상하고 초라한 행색에 순경은 불공스럽게 『직업 이 뭐야?』 물었다. 그가 판사라고 대답하자 순경은 곧이 듣지 않고 오히려 더 호통을 치더란 이야기가 있다. ▲그 자신 죄인에게 형을 언도하는 그들과는 상극된 판관의 위치에 있으면서 그 숱한 죄수들을 감동 감화시켜 영혼을 구제한 그 힘 역시 그는 인생의 궁극목적이 어디있나를 깊이 깨닫고 그것을 직접으로 수행한데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가 행사하는 『법률까지도 그 주장하는 절대적 정의가 불완전한 것』 임을 인식하고 먼저 인가의 정리(情理)를 앞세워 참된 인간정신을 발휘한데서 그는 명판사일 수 있었고 수인(囚人)의 진정한 것이 될 수 있었으리라. 연령이여 주안에서 평안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