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동에 자리잡고 있는 교리신학원 졸업식이 지난 토요일 오전 10시30분에 본교에서 거행되었다.
그동안 본 학원은 지방에서부터 피눈물 나는 역경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간 졸업생 26명을 내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 각 지방교회 포교전선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그 성과도 대단한 것이다.
한국은 전교지방이다. 성경 말씀을 빌린다면 추수할 것은 많은 곳인데 일군이 없는 메마른 지방이다. 그래서 누만리 이국에서 언어가 다르고 풍속과 생활양식이 다른 외국선교사들이 매일같이 밀려 들어오는 실정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외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진리에 메마른 우리 고장을 우리의 손으로 가꾸어야겠다는 비장한 결심과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언제나 「메너리즘」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그런 비건설적인 사고방식을 하루 바삐 불식해야 겠다.
가톨릭교회의 사업 중에서 무엇이 가장 크고 긴요하고 중대한 문제이겠는가? 라는 문제를 놓고 대답해보자. 학교도 병원도 고아원도 아니다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사업이다. 가톨릭의 신학교와 신학교에서 사제품을 받은 사제들의 위치는 우리 육체에 비유한다면 심장과 같은 부분이다. 심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데는 눈에 보이는 다른 지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장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그 시간이 곧 죽음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의 심장부가 마비되는 날 우리 교회도 죽고 말 것이다.(물론 성신의 교회니까 이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심장의 부분이 보이지 않으니까 자연 무관심하기가 일쑤이듯이 우리 교회의 신학교문제에 대해서도 자칫하면 방관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성소를 받아 성직반열에 오르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또한 그 만큼 많은 시간과 경제력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직자의 부족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 가톨릭은 성직자들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평신도의 사도직을 부르짖고 있다. 그렇다면 평신도로서 사도직을 한다는 것은 교회의 어떤 사업보다도 요한 것이고 현실 가톨릭의 절실한 부르짖음이다. 따라서 평신도들에게 철학신학의 기초를 가르치는 평신도 신학원이 대두하게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에서 이런 기운이 없지않으나 아직도 너무 미약하고 일반 대중들의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은 참말 한심한 일이다.
각 교구에 적어도 평신도 신학원 한 개 쯤은 있어서 거기서 평신도 교리교사를 양성해야만 포교일선 성직자들이 요구하는 숫자를 충당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교리교사를 찾아 헤매는 일선 신부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평신도신학자가 없는 한국은 과거의 경우를 보면 아무런 철학 신학의 기초없는 평신자들에게 교리강의라는 힘에 겨운 일을 맡겼기 때문에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빚어내는 정신적 손실이란 막대한 것이다. 그들의 불가항력적인 교리의 곡해와 여기서 교육받는 예비신자들의 신자바탕은 불문가지의 사실이 아닌가?
우리는 이런 것을 탈피해 하루바삐 무능한 소위 「전교 회장」을 새로운 현대적 교리교수법을 배운 신인 교리교수들로 대치해야겠다. 이러기 위해서는 평신도 교리교수양성에 전력을 기울여야겠고 여기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야 될 줄 믿는다.
이러한 우리한국의 실정에 미루어보아 이번 교리신학원 졸업생의 졸업장은 내일의 한국 가톨릭을 약속하는 하나의 지표로 보고 싶다. 또한 우리는 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교리신학원실무자들을 뒤에서 밀어주어야 하겠다. 이것이 크기 위해서는 토양이 필요하다. 기껏 생각하는 것이 외국의 원조를 받아야만 교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것만이라도 우리의 힘으로 건설하고 키워야 하겠다. 한국 가톨릭신자들은 봉재 때 뭘 하는가? 외국에서는 한날 한날 모아서 전교지방에까지 보내주는-.
요컨대 우리 한국 가톨릭도 평신도사도양성에 대해서 다른 어느 때 보다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주력해서 성직자의 부족을 메워나가야 될 줄 믿는다. 이런 점으로 보아 금번 교리신학원 졸업생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자극과 기대를 주고 있다.
한가지는 교리학원의 문을 나시는 평신도 신학자들은 우리교회가 요구하는 사도직에 충실하여 교회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