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編輯室에 一言 / 韓바오로(全州市 西南 松洞 六三九의 三 中央天主敎會)
천주교내의 홍일점으로 중요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시보가 신자들에게 어느정도 보급되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60여만 신자에 가톨릭시보가 출간된지 4백50여호에 이르는데 그 보급률이 극히 저조한 원인은 무엇일까? 시간이 없어서 등 이해를 못해서 이런 구실을 다는 교우들 간에는 영화관이니 부덕(不德) 잡지에 시간을 소비하는 데는 인색치 않다.
그들의 부덕 사상이나 열의를 탓하기 전에 편집자로서도 한번 생각할 문제다. …가령 가정난이라든가, 여성난 또는 어린이난동등을 한면쯤 교대로라도 할당하여 가정‧사회‧문화면 등 다채롭고 이해할 수있는 방향으로 다루어 주었으면….
사대첨례 같은 때에도 증면 특집을 꾸며 봄도 좋지않을까? 강권이나 체면에 의지하여 구독자를 구하기에 앞서 자의에 의한 자발적 구독자가 많이 생기도록 자체충실을 기함이 구독자증가에 첩경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미사참례와 옷 / 成바오로(충북 음성읍 천주교회)
흔히 여교우들 중에 『입을 옷이 있어야 교회에 가지』하고 체념 조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여우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있단 말인가, 어느곳에나 다 계시고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모두 아시는 그분, 천주께서 성당에 좋은 옷입고 왔다고 반겨 주실리 없다. 찢어진 옷, 누더기 옷이면 어떠냐. 잘꿰매고 빨아서 깨끗하게만 입으면 될 것이다. 깨끗한 옷이란 새옷 좋은, 옷을 말하는게 절대 아니다. 헌옷이라도 잘 짓고 빨아서 입으면 깨끗한 옷이 될것이며 좋고 새 옷이라도 빨지 않으며 더러운 옷이될 것이다.
성당은 사치를 검소하게하고 그릇된 마음씨를 고쳐주고 겸손되게하는 성스럽고 거룩한 집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옷차림을 그만두자. 깨끗한 옷 단정한 옷이면 되는 것이다.
■ 修女의 表樣 / 朴永洙(부산市 凡一洞)
교회와 사회사업등에 헌신하며 천주님 뜻대로 생활하고 예수의 정 배이시며 성모님의 딸인 수녀들님께 한마디 제언 합니다.
덕이 궁핍한 이 시대에 공자님이 주장하시는 그러한 성덕은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사람들에게 불쾌와 불만을 주는것은 피해야 될줄 압니다. 옛날은 수녀라고하면 모든 사람들이 지상의 천사라고 보았고 경모하였읍니다만 이즘의 수녀님들은 사무적이며 영리해서 「시베리아」 한풍(寒風) 같은 싸늘한 표정을 대할때가 있습니다. 필수품 사실때 이왕이면 교우 집에서 사시는것이 좋지않을까요. 또 교우들 에게도 손해가 나도록 물건을 깎아서야 되겠읍니까? 「나사렛의 살림」을 알뜰히 사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지나치게 타산이 심해 불쾌한 감을 주지 않도록 함이 좋을듯 합니다. 각박한 세정에 온정, 인자한 마음씨와 태도를 가짐으로써 수녀님 본연의 사명을 잃지 안토록 감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 靑年들의 信仰 / 李玉光(부산시 동대신동 3가 5번 동아대학제二년)
오늘날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힘만 자랑하며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사랑하고 기분에 의존하고 살아간다. 과연 이것만이 그네들의 행복의 대상일까? 세상사물만을 사랑하는 그들은 이세상 떠날때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허무한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그땐 이미 때가 늦어 후회와 고통에 싸인들 소용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각하기를 내일로 미루는 것일까? 우리 주위는 악한신비로 싸여있고 인생의 무상함은 막을 길이었다. 너가 죽을때 누가 기억해주랴! 할수있으면 지금하라 지금은 매우 귀한 때요 성총을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고리토전서 6·2) 오늘날 청년들의 영혼상태는 지향을 분간할길 없는 암흑에 둘러 싸여있다. 일시적 혈기와 절제없는 행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멋대로만하는 기회를 주신것이 아니라 공로를 세울 기회를 주신다.
■ 우는 아기 / 金泰文(全北 任實郡 任實面 甘城里)
우리는 미사때 어린애의 우는소리, 그리고 장난꾸러기 꼬마들의 말소리, 미사에 늦어오는 사람들의 문 여닫는 소리등 이런것에 신경이 자극되고 분심이 들어 드디어는 얼굴을 찌푸리고 혀를 차게된다.
이때 어린이 엄마는 어떨까?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천진스러운 아기의 울음을 너무 거스려 듣지 않는것이 좋을 것이다. 물른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자각하고 각자 교양으로써 십분주의할것은 두말할 나위없다. 그러나 방해를 받는 교우들도 이해와 사랑과 아량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 주께사랑을 얻고자 미사에 참례하고 있을진데 어찌 자신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 소소한 일에 관대 할줄 모른데서야 될법한 일인가? 먹는것 만이 낙으로 보이는 어린애도 천주께 무의식적인 노래를 봉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들어 대는 상대를 핀잔주기 전에 우리는 함께 온전한 영과 정성을 주께 드리고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해보며 다같이 성당 내에서의 예의범절을 매우고 가르치고 연구해 봄직하다.
■ 가톨릭 運動 / 양항규(전북 남원읍 동충리 73)
우리는 천주의 자녀로서 현세에서 해야할 임무가 무수히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계층의 학생과 젊은 세대들은 다함께 무신론자들을 위해 활달히 전교운동을 해야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충분히 교리지식을 배양하고 사회적인 교양도 풍부히 갖추어 그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짐으로 경험과 관찰력과 창의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그리하여 가톨릭학생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용감히 사회악앞에 대항하여 정치·경제·문화·교육등 모든 부면에서 「가톨리시즘」을 선양하여 개신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임무를 지닌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