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궁에 허리가 휘어질 빈농촌은 참으로 이 삼사월 긴긴해가 얼마나지 지겨운 계절일지 모르겠다. 어느 행여자 수용소를 갔더니 여기서도 이봄은 어느 해보다 굶주림이 자심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멀국에 허연 실오리 같이 뜨는 국수를 건져 먹느라고 골돌하다. 겨우 연맹이되는 두끼 깡보리밥에다 국수한끼를 곁들인 이 새끼만이, 이거 정지된 시간 속에 살아남은 듯한 무료하기 짝없는 그들에게 「리듬」 이다. 일천여명의 무의탁자들이 패잔병처럼 늘어앉아 있다. 거의가 거리에서 행걸(行乞)하던 이들은 이제는 생에 대한 실의, 현실이탈, 무염치 무감동의 상태에서 현실 저항도 없이 나태와 안일(?)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수치심까지 포기한 거의 낙천적으로된 이 초탈아닌 초탈자들은 생활 의욕을 잃은 난치의 정신적 병질인격자로 사회문제로 되어있으나 아직은 오히려 시회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전혀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겐 존명(存命)을 위한 기본요소인 단순한 의식주의 절실한 욕구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최소한으로 위축시키고 체념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들의 이러한 인생의 나락(奈落)의 경지는 외부적 악조건과 환경에도 기인되지만 자신과 또한 외부에 대한 책임의식을 너무나 쉽사리 포기하는 그들의 노력부족에 있음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와같이 인생을 전적으로 체념한 무리가 있는 반면 세상에는 부귀나, 명예욕 등, 왕성한 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아중심적 이기주의로 발로되면 이는 오히려 전자의 자아포기보다 더한 사회악의 요인이될 것이다. 또 한편 인생 그자체에 진지한 가치를 부여하고 적극적 삶을 추구하는 값있는 인생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이며 의미있는 인생조차 죽음에 직면해서는 일체의 무의미와 허무속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시현한 구속의 현의와는 먼거리를 둔다.그리고 또한 그들중, 어떤 형태의 인생이 그리스도교의 영생의 은총을 보다 쉬이 입을지는 우리의 이지(理智)로서는 없다. 그 실의에찬 행여자 수용소에 나날이 구도자가 늘어 간다는 소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