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지기의 청년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자정이 가깝도록 남산의 팔각정에 홀로 앉아 시가지의 명멸하는 찬란한 불빛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이제는 다시일어설수 없는 허무와 절망감에 싸여있다는 것이다. 이 청년의 이런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어떤 의미의 지나친 결벽증으로 항상 현실타협이 불가능한데다가 그의 이상과 현실과의 차질이 끊임없는 반발과 내적인 고뇌를 자아내어 이번에도 또다시 직장을 무단이탈하는 불상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헌데 그는 단순한 망상가거나 현실타결에 태만한것도 아니다. 그의 오랫동안의 각고의 노력과 인내는 주위가 다 인정하는 바인데 어쩐지 거듭하는 난관에 좌절을 당하고 그때마다 현실부정에서 오는 이런 절망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같은 객관적 상황에서도 사람은 저마다 느끼는 고통의 비중이 다르다. 허지만 현대와 같은 이런 부자연한 사회구조 속에선 이런 유의 아집(선의의)이나 결벽한 인간에겔수록 그 소외감이나 부담이 더욱 심한것도 사실이다. 허나 달리 종교적(신앙)인 구제의 길을 갖지못한 인간에 있어서도 사람은 부단히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서 어떤 새로운 개선의 길을 모색 해야만이 지성과 의지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경지에서 어떻게 좌절하느냐에 따라 그 인간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느낄때, 아마 어떤 의미로 오히려 너무 이상적이기 때문에 소심하고 자존심이 강한 이런 부류의 청년은 자살직전의 절망상태에서 다시 한번 눈을 떠볼는지 모른다. ▲이런 정신적 염세자들은 그 허잘나위없는 지성의 허영때문에 좀체 신앞에 꿇어 앉기가 힘든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고독한 투쟁을 단순히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해 버려야할까? 이러한 고통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뿐아니라, 죄의 유혹에 허덕이면서도 천주의 은총을 갈구하는 투쟁의 고통뿐아니라, 또한 이러한 암중모색에 잠긴 고통에 대해서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천주는 그 인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한 투쟁에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눈뜨고 당신을 계시하시는 천주를 대면 할 가능성을 더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천주의 사랑의 심연(深淵)은 어떤 인간의 절망의 심연보다 더 깊다. 사랑으로 죽음을 쳐이긴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