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영혼의 救援을 목마르게 갈망하였다. 이것이 모든 改革과 鬪爭을 하기에 앞서 해결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近代知性은 無性格的이다. 이러한 無性格을 구제하는데 필요한것은 現代知性에다 秩序意識을 도입하는 일이었다.(本文中에서)
내가 長老敎에서 가롤릭敎로 改宗하게된 동기는 무엇인가. 山河를 진동시키는 포성과 초연, 民族大多動속에서 해체되어가는 祖國의 운명, 占領地帶에서 젊은 自由의 「레지스탕스」 운동자들의 集團虐殺과 國內政治의 혼란 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공포뿐이었다. 공포라는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을때에 人間 救援과 社會改革을 위하여 불타오르던 不條理에의 反抗과 人間集團의 共同運命體에 대한 나의 신뢰는 흔들거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나의 영혼의 救援을 목마르게 갈망하였다. 이것이 모든 改革과 鬪爭을 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어느날 나는 국립도서관 복도에서 카푸카의 作品을 읽으면서 終末論的인 사색을 하다가 우연히 長老敎會의 某목사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위협하는 공포와 파괴적인 自我分析에 견디지 못하여 위선 목사님의 인도로 長老敎會에 入敎하였던 것이다.
宗敎에 대한 나의 관심은 먼저 近代知性에 대한 懷疑로 부터 시작한다. 즉 近代知性에 缺한것은 「모랄」 意識, 「도그마」, 歷史意識과 傳統理念이다. 따라서 近代知性은 無性格的이다. 이러한 無性格을 구제하는데 필요 것은 現代知性에다. 秩序意識을 도입하는 일이었다. 먼저 近代의 소위 傳統과 革命의 對照論을 고찰하여 보았다.
近代思想의 公式은 독일 觀念論이 설정하여 놓은 바 觀念的인 對立範疇에 따라서 現實을 위한 保守와 革新으로 양분하여 保守는 反動이요 革新은 進步라는 정의었다.
그결과 近代의 소위 合理主義思想에 있어서는 現在는 언제나 過去와 未來의 대결장이었고 따라서 過去는 폐물이 되어 가톨릭敎는 保守의 牙城으로 轉落되었다. 그러면 保守대 革新이라는 近代的 思考의 파탄에 대한 代案으로서 現代 知性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歷史意識이다. 宗敎改革으로 부터 시작하여 「맑스」 革命에 이르는 장구한 프로테스탄 文明(近代文明)이 3·4백년간 적대시하여 온바 歷史意識은 새로운 인식과 체험의 歷史的 地盤으로서의 傳統의 존재이유를 굳게하여 준다. 이리하여 나는 傳統을 保守 라는 낡은 개념에서 해방하여 過去와 現在의 有機的 再調整이라는 現代的意義를 부여하는데 성공하였다.
다음에 傳統속에다 正統意識을 도입하였다. 여기서 傳統은 그리스도敎의 傳統이요 그리스도의 正統은 가톨릭敎를 말한다.
가톨릭敎는 保守的宗敎로부터 면목을 일신하여 새로운 歷史的 使命을 띠고 現代에 군림하여야 한다.
다음 단계로 나의 관심은 聖書硏究로 전환한다. 宗敎는 원래 儀式과 聖書硏究가 병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新敎에서 儀式을 경시하고 聖書硏究에만 주관적으로 치중 할때에 그 결과는 어떠한가. 內容과 유리된 形式은 공허하고 形式을 도외시한 內容은 客觀性과 普遍性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現代美學의 命題다. 聖書硏究에서 天主말씀의 眞理를 分析 하는데 批評意識의 소위 客觀性을 유지하고 眞理의 普遍性을 해방하는데 실패 할때에 聖書硏究는 위험한 함정에 빠진다.
聖書字旬에 대한 독자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은 결국 4백여파의 新敎派를 만들어 놓치 않았던가. 近代의 印象批評과 主觀批評의 피할 수 없는 末路인 것이다. 批評에 있어 소위 客觀性이 유독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루에게 계승권을 주시며 『너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나 하늘에서 맬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라. …너는 베드루라. 나의 반석 위에 내성교회를 세울 것이니 지옥문이 쳐 이기지 못하리라』하셨다. 이 말은 地上敎會의 통솔권을 베드루에게 위임한다는 뜻인데 베드루를 계승하는 가톨릭은 그리스도敎의 正統이다.
그리스도의 眞理의 普遍性과 客觀性은 가톨릭敎에서만이 구체화되고 해방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眞理分析에 있어서 個性의 氣質에다 무한한 가치와 신뢰를 두는 대도를 경계하여야 한다. 人間은 그렇게 完全한 存在가 아니다.
따라서 人間에게 통제와 조직에 의한 훈련을 권하고 싶다. 질서가 특별히 現代的 意義를 띠는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나는 가톨릭敎에서의 「도그마」의 설정이 「도그마」를 위한 「도그마」로 誤用되는것도 경계하였다. 인류의 文化史는 가톨릭敎가 역사상 체험한바 몇가지 試行錯誤를 제시하여 준다. 戒律은 사랑을 秩序化시킬 때에 한하여 正當化된다. 그러니까 戒律이 사랑의 잊어버리고 戒律을 위한 戒律이 되면 그것은 엎질러 놓은 「도그마」요 獨善이다. 知性은 科學構神에 훈련되고 自由와 「휴매니티」를 위한 戰士였다.
따라서 戒律과 사랑·自由‧「휴매니티」의 관계를 어떻게 재조정하는가- 그것은 가톨릭敎를 現代化하는 길이다.
2月 28日에 영세를 받고 3月 1日에 견진을 받았다. 原罪와 本罪 사함을 받고 天主의 義子와 軍士되니 공포와 불안은 일소되고 장엄한 平和가 군림한다. 내 마음속에는 復活이 胎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