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일간 신문에 「유리선언」을 내걸고 신문 잡지 방송 영화 연예(演藝) 음반(音盤) 등 대중을 움직이는 「메스·콤」의 건전한 윤리를 호소하는 것 같다.
한편 기쁘면서도 또 한편 슬픈일이다. 일찌기 보지못했던 「윤리선언」이 신문지상에까지 나타나야만 하는 우리 사회가 슬프다. 신발이 발에 맞지 않을때 신발 타령이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신이 발에 알맞고 어떤 지장도 주지않을때 신발에 관심이 없어지는 법이다. 우리가 「윤리선언문」을 들고 나온다는 그 자체가 우리 한국사회의 윤리부패를 역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되었던 현사회를 직시(直視)하고 잘못을 고쳐보겠다는 몇몇 「엘리뜨」들의 꿈틀거림이 있다는것은 실로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윤리선언문」을 앞에 놓고 우리로서 생각해야할바는 무엇인가? 여러가지로 많다. 하지만 지면관계로 한 가지만 역설하고 싶다. 윤리니, 도덕이니 하지만 그것들의 핵심이 무엇인가? 선과 악을 갈라 놓을수 있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 말이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윤리와 도덕을 찾아야되는가 말이다. 극단적으로 우리가 윤리·도덕가가 되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도덕을 쫓아 선인이 되고자하면 사회적인 모욕과 비굴 조소를 받아야하는데 이런 모든것을 무릅쓰고도 양심을 따르는 선인이 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눈을 속이고 부정과 횡령을 요령것 잘하는 사람을 일컬어 현명하다고하고 그렇지못한 사람을 우자로 지탄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선인과 악인의 판단기준이되고 있는데 그 모든 모욕을 극복하면서까지 윤리선언을 할 수 있는 윤리의 참된 가치를 우리는 알고 있는가?
양심을 따르고 윤리도덕을 따르면 권리를 잃게되고 황금성이 무너지는 판인데 권리보다도 황금보다도 더 값스런 윤리의 알맹이가 무엇인가 말이다. 윤리의 참 가치 그 알맹이를 제시하지않는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껍질뿐인 윤리선언이 되고 말 것이다. 끝내는 윤리도덕을 찾는 것은 약자의 방패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윤리원칙을 만드시고 양심법을 만드신 윤리의 최고 주관자 천주님이 없는 윤리는 알맹이 없는 빈깡통에 지나지 않는다. 무신론자 칸트가 그의 「실천이성비판』을 쓸때 윤리의 기준과 선과 악의 핵심을 찾지못해 드디어 윤리행동을 할때는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영혼도 있고 죽은다음 내세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한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선언」 그 자체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윤리선언 문제는 먼저 그것의 뚜렷한 목적과 그 핵심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관습적이고 인습적인 윤리 도덕율은 언제나 구호에 끝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알맹이 없는 껍질 윤리를 우리는 타도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해야할 바는 우리는 누구보다도 윤리의 원칙을 알고 있다. 우리의 잘잘못을 판가름할 윤리의 최고심판관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자(文字)로써 윤리선언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로써 윤리선언을 해야 마땅한 일이다.
한톨의 씨알로써 그러나 그것이 썩어서 새 생명을 결실시키는 씨알로써 우리는 윤리선언을 해야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는 비례로 사회악은 떨어지지 않고 상승일로로 보다 많은 폐륜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가?
요컨대 신문지상의 윤리선언 그것이 우리 사회를 정화시킬수는 없는 것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 이런 기회에 다시 한번 어두운 사회에 빛을 던질 수 있는 산 신앙생활을 통해 윤리선언을 해야하겠고 이것만이 참된 윤리혁신임을 선언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