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靈的으로 너무도 헐벗고 상처뿐인 自身의 가냘픈 人間像을 發見했고 이 가냘픈 人間이 敢히 홀로는 이 大地를 밟고 서지는 못하리라는 確信을 갖게 됐다. (本文中에서)
1963年 9月의 祝福받은 햇빛이 大地위에 가득한 어느날, 나는 햇빛 보다 더 따사로운 天主님의 은혜속에서 새로운 삶의 紀元을 이루었다. 서울에서의 領洗準備를 마치고(마침이라는 말이 지극히 애매하기는 하지만) 轉動地였던 大邱桂山洞 敎會에서 鄭베드루 神父님의 가르치심으로 領洗를 받기까지에는 나대로의 짤막한 歷史(?)를 지녔다 어려서는 어머님 따라 山中 寺를 찾아 부처에게 기구도 했었고(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우리 어머님은 부처께 아들하나 더 주십사고 기구를 많이 하셨다) 친구들과 함께 基督敎敎會堂도 찾아 다녔고 하다못해 統一敎會까지 쫓아 다녔다. 희미하게나마 信仰生活을 가져야 하겠다는 內的 外的인 必要性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天主敎 聖堂의 門을 처음 밟게된 것은 지금부터 약 10年前인 學窓時節에 같이 下宿하던 친구에 依해서였다. 때는 마침 復活節미사. 장중하기 이를데 없는 儀式을 通해 敬虔히 머리 숙여진 나의 마음속에는 天主님에 對한 微粒者로서의 自我發見같은것만 意識하게됐다. 그러나 그것은 瞬間的인 낭만이었고 眞理의 터득은 되지못했다. 오히려 틀에 박혔다고 할 정도의 禮式이나 妥協을 모를 정도의 排他性이(적어도 당시의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天主敎에 對한 나의 認識을 더욱 흐리게 했을 뿐이다. 特히 外部의 認識은 물론 나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天主敎는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聖母마리아를 믿는 宗敎이며 루터가 宗敎改革을 하지 않으면 안될정도의 腐敗한 宗敎의 後身인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니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者의 얼마나 오만불손한 자기도취인가!
그러나 人生을 터득하면 할수록, 工夫라는것을 하면 할수록 心靈的으로 너무도 헐벗고 상처뿐인 自身의 가냘픈 人間象을 發見했고 이가냘픈 人間이 敢히 홀로는 이 大地를 밟고 서지는 못하리라는 確信을 갖게 됐다. 나는 여기서 자가도취의 오만불손을 털고 바꾸어 말하여 더덕더덕 붙은 罪意識에 사로잡혀 大眞理앞에 설 勇氣마저도 잃은 自身을 이끌고 不安을 털고 비굴을 벗고 오만을 씻어 보자고 거의 마비된 視神經을 도사려 거룩한 祭壇앞에 엎드렸다. 여기 한 少女의 引導가 있었음을 附記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그 少女를 包含한 모든 校友들의 引導는 고독하리만큼 領酷했고 조심스레 門을 두드린 나에게는 거의 거만하리만큼 滔滔하기만 했다. 狂身的인 傳敎를 하고 있는 他 宗敎와 比較해서오는 心證인지는 모르지만 어쩔수없는 싸늘한 感情이었다. 물론 그날의 太陽은 나를 마음껏 祝福해주듯 따사로웠지만….
原罪와 本罪를 물로씻는 씻는 領洗儀式이 進行되는 동안 나에게는 不安도 卑屈도 교만도 자취를 감추고 내 一生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눈물이 가슴을 적셨다. 하늘에라도 날을듯한 나의 가벼운 마음은 내옆에서 길가는 유치원 아동과도 가까운 對話의 벗이될 수 있는 「어제의 나」가 아닌 새로운 自我의 發見이 可能했다.
하늘의 祝福이 내 마음속에 피어오르고 가냘펐던 나의 對話가 저 드높은 하늘에도 미치는 것만 같았다.
無限의 眞理가 우리앞에 놓여있다. 이제 나는 이 無限의 眞理와 맞서서 싸우리라는 그리하여 是非를 하고 判斷을 내린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났다.
一生을 두고도 깨우칠것 같지 않는 大眞理의 조그마한 한 部分 한 部分을 배우며 깨우쳐서 天主님께 나아가 부럽지 않는 「내」가 되어야겠다. 領洗를 받던 그날의 心的 平安과 靈的感激을 지켜 나갈뿐만 아니라 그 平安과 感激을 남에게도 나누어 줄수있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다짐하고 있노라니 옆방에서 天主님께 기구하는 어머님의 간절한 정성이 들린다. 아- 나는 天主님과 옆방에서 기구하시는 어머님에게 不孝한 子息이 되어서는 안될텐데- 아직껏 나의 獨白이 서럽다.
金準喆(文化放送 首席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