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모래 깔린 「푸라타나스」 밤길을 저벅저벅 걸어가면 머리위 어둡고 울창한 숲에 깃든 새들이 푸드득 거린다. 장미원을 두른 측백나무 울타리를 따라 둔덕에 오르면 이제 5월도 겨운 성모동굴엔 아직도 불이 환히 밝혀져 있다. 지난밤은 회칙 「멘세 마요」 반포 기념 「성모의밤」이 있었던 뒤라 숱한 인파가 밀려간 광장처럼 지금은 더욱 적요하기만 하다. ▲문득 무릎앞에 흩어진 촉루(燭淚)를 하나 주어들었다. 무엇인가 거기엔 인간의 절실한 염원이 깃든 마치 바로 그 누구의 눈물의 잔해같은 느낌조차 든다. 어제밤 겹겹이 모여앉은 사람들 개중엔 몇몇 낯익은 이들도 있고, 수염을 허옇게 드리운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경건히 무릎꾼 창건한 청년들, 어떤 대학교수님도 보이고 참으로 「릴케」의 그 「소녀의 기도」를 연상케하는 다소곳한 소녀도 있었다. ▲누가 여자를 험한 항로를 거쳐온 배가 돌아가 쉬는 포구에 비한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근원적인 표상인 성모는 인류의 평화의 항구(港口)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고통의 멍에 슬픈 애소를 싣고 길떠나지 않았던 자가 누구일까? 그러나 참으로 이 험준한 항해를 마치고 고달픈 어쩌면 찢어진 돛을 거두어 쉬어갈 항구가 어디있음을 아는 이는 고통중에도 희망과 안식과 꿈이 있다. ▲현대인은 그 허다한 인간필연의 고통, 미약과 고독과 궁핍과 모욕과 혼돈을 지고도 그 고통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지향이 없다. 뿐만아니라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의 「자유에 처단」된 그 중량을 잃은 고통은 그 자신을 실은채 마치 풍선처럼 허공을 지향도 없이 권태와 혐오속에 떠내려갈 것이다. ▲그들은 어떤 사랑을 기도하나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않는것, 베르나노스의 말처럼 『우리 힘으로 사랑한다고, 천주를 의지하지않고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물에 비친 달그림자에 손을 내미는 미치광이다』 참으로 탑익한 인간의 형상으로 자유로워지고자 나서는 저들의 고달픈 항로는 어느 기슭에서 닻을 내릴까? 5월의 훈풍처럼 평화로운 이 포구로 그들의 생에 지친 배가 돌아오기를 성모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