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나 오라! 나의 동무, 나의 어려쁜 자여! 보라, 겨울은 가고 비는 멎어, 들에는 꽃이 피고 나무가지를 전지할 때가 이르니, 우리밭에 그윽한 산비둘기 소리 들리는구나』
(雅歌 2, 2월 11일 루르드 성모발현 축일 층계경 참조)
이렇게 노래하기엔 자연의 계절은 아직도 이르다 할는지.
허지만 이 시간에 주께서 우리를 이같이 초대하시고, 공의회를 통하여 새로운 세기(世紀), 회춘(回春)의 문을 연 교회가 오늘날 우리 모두를 이렇게 불러내고 있다.
공의회가 전하는 사랑과 진리의 「메시지」를 깊이 음미하고 묵상할 때 그 소리는 우리 귓전에 시시각각으로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공의회는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다. 모두가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주의 포도밭에 일하러 나아가라고 불러내고 있다. 보다 더 큰 결실을 기하기 위해 우리 과목(果木)의 묵은 가지를 쳐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다.
공의회가 반포한 헌장 율령 선언문 등은 물론, 산상수훈(山上垂訓)을 방불케 하는 사회 각 계층에 보내진 그 복음적 「메시지」를 읽을 때 우리는 실로 이 시간에 살게된 그리스도자(者)의 기쁨을 벅차게 느낄 뿐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사목자 신자를 막론코 간나한 자도 부한자도 노동자도 지성인도 다함께 이세대(世代)의 천주의 백성됨을 자각하고 신앙의 생활화와 교회의 내적쇄신 그리스도교 일치와 인류 세계의 구원을 위해 총궐기해야겠다는 다짐을 굳세게 가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성년(聖年)의 취지와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벌을 면케 하는 은사를 주기위해서만이 아니다. 또 후세의 공로를 더하는 고신극기를 권장하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첫째로 공의회가 계시한 정신과 지침을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근본적으로 쇄신하고 우리에게 부과된 이시대의 인류구원의 위대한 사명을 자각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현실에 살면서 그 복된 소식을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실의에 젖은 모든 형제들에게까지 전하여 그들에게 재생의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새로운 성신강림을 이 시대에 성취시켜 온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 성년동안에 모든 교구와 본당, 모든 수도회와 가톨릭 「액숀」단체, 모든 사목자와 신자들의 중요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공의회이고, 우리 사이의 연구와 묵상의 가장 큰 「테마」는 오직 공의회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실정은 어떠한가? 우리는 물론 서구(西歐)의 선진교회의 그것과 같은 벅찬 쇄신기운을 한국교회 안에서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 나름으로서의 노력과 동향은 있어야만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이같은 고무적인 현상을 한국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고군분투(孤軍奮鬪)와도 방불한 노력이 산발적으로 없는 바 아니나 전체적으로는 공의회가 아무리 그 자체 역사적이고 위대하였다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무관심과 그 타성을 깨뜨리기엔 오히려 무력한가 싶으니 비감마저 금치 못할 지경이다.
도대체 한국교회는 자체의 쇄신 필요성을 어느 정도 실감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신자들의 태반은 지금이 그것을 위한 성년이라는 것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싶다.
그렇다면 이 탓은 결국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구태여 이 자리에서 그 책임소재(責任所在)를 추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에 우리 전체의 후진성(後進性), 즉 신학의 부재(不在) 영성(靈性)의 빈곤에서 오는 무기력을 절감치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자(者)의 양심마저 마비돼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여하한 쇄신의 부르짖음도 이 양심에 메아리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분명한 것은 공의회의 성패(成敗) 여부는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사목자, 신자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의 관심을 공의회에 대하여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공의회는 한국교회 안에서도 성과를 내는 공의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공념불(空念佛)에 불과할 수도 있다.
개중에는 공의회에 대하여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아는 바 없으니 비록 뜻이있다 할지라도 무엇을 연구하며 무엇을 착수해야 할지 모를 수밖에 없지 않는가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위선 듣기에는 당연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이는 결코 본지(本紙)와 기타 교회출판물이 미력이나마 공의회에 관한 보도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비록 공의회 16개 교령중 단 하나에 불과하다고는 할지라도 이미 오래전에 우리 말로 번역 출판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전례헌장이다. 그런데 이 전례헌장이 우리 본당과 신자들간에 얼마나 읽혀지고 얼마나 연구되고 있는가? 과문한 탓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같은 소식에 많이 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누구나 이 헌장을 숙독하고 묵상한 사람이면 이것만으로서도 오늘의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의 생활화 및 교회쇄신은 물론이요 공의회가 밝히는 천주의 백성의 교회관, 그 교회의 일치노력 현대세계 내에서의 사명 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자들이 이 헌장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곤 전에는 「라띤」말로 바치는 미사를 이제는 우리말로 바치게 되었다는 정도다. 그것으로선 증진돼야 할 신앙생활의 성장도 천주의 백성의 자각도 없다. 심지어 사목자들중에는 그 헌장이 강조하는 새로운 사목정신을 전혀 인식치 못하는 듯한 이도 없지않다.
때는 바야흐로 병인년 교난 1백주년이다. 어느때보다도 순교정신의 앙양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순교정신은 복자기념성당 건축비 모금을 위해서만 강조되고 말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무엇보다 앞서 이 시간의 교회가 공의회를 통하여 외치고 있는 그 쇄신을 위해 강조돼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이 성년기에 우리안에서 공의회가 현실적으로 목적 달성할 수 있기 위해 사목자 · 신자 할 것 없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순교정신으로 총력전을 전개해야 한다. 아니면 한국교회의 내일은 참으로 암담하다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