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문제가 되어있는 것 중에 하나는 현대의 인구문제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과잉 인구 증가에 대해서 지나친 공포증을 갖는가 하면 또한 편 인구조절에 관한 방법에 있어서 가지가지로 우리를 놀라게하는 일도 없지 않다.
인구론에 대한 문제는 현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기부터 있어 온 문제이다. 세기의 물결을 타고 우리나라에는 그것이 파급된지 수개년이 되었다. 그간 「적당히 낳아서 올바로 기르자」는 「슬로간」 밑에서 실로 가증스러운 일도 한두 건이 아니었다. 태평양지구의 가족계획 총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고 있으니 그 영향이 더 일층 우리에게 미칠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우리의 주장을 천명하고 싶다.
우리의 주장인 즉 이렇다.
인구문제로 오는 현대위기 자체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요. 여기서부터 결과되는 가족계획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족계획을 하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의 죄악성을 반대할 따름이다. 우리는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자연법을 어기면서 인륜(人倫)의 대조(大道)를 어기면서까지 가족계획을 할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체스터톤이 비꼬아 말했듯이 사람이 열사람이 있고 모자는 일곱개밖에 없을때 고루고루 모자를 갖는 방법으로서 세 사람의 목을 자르는 그따위 잔인무도한 사고방식의 가족계획을 반대한다는 말이다. 모자가 없는 세 사람에게 인권을 존중해서 없는 모자 셋을 만들고저하는 노력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소위 계획이란 이름을 빙자하여 약한 생명을 죽이는 것은 마치 모자와 인격체를 놓고 모자때문에 인격체가 희생당하는 자연의 역행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대자연의 질서를 운운했넷자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자마저 부정하는 그들에게는 아랑곳 없을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한 주인공으로서 과거 선진국가의 가족계획 실태를 올바로 관찰해 주었으면 좋겠다. 제로 비참한 역사를 가진 국민을 우리는 눈으로 보았다.
독일이 그랬고 불란서가 그랬으며 현금 이웃 일본에서도 가족계획의 병마로 노동력부족에 허덕이고 있지않는가? 역사의 심판은 공정하기 마련이다. 우리인들 그들의 전철을 밟아서 그들이 불행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은 가끔 스스로 절대자인양 착각을 하기 쉽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것이 성취되리라 착각하기 쉽다.
반자연적인 새로운 최악의 방법을 찾기 전에 이미 있는 대자연을 개발하는데로 눈을 돌리는것이 인간 자신을 올바로 보는 행위일 것이다.
대자연을 거역하면서 인간의 능력을 절대시하며 죄악성의 가족계획을 감행하는것은 마치 「스키·펜」들이 여름에도 「스키」를 즐기고저, 섭시 30도에서도 눈이 내릴 수 있도록 궁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교단에 극한 인간은 생명의 씨앗을 죽일 수도 있고 인간의 생명권을 남용하여 어린 생명을 죽일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추궁받을 때 그것은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마치 죽음이 찾아올때 그것을 거부할 수 없듯이 불덩이에 손을 집어넣고 그 뜨거움을 거부할 수 없듯이 윤리의 심판자 앞에서 책임회피를 할 수 없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같지만 우리는 다시한번 대자연의 법칙앞에서 겸손된 인간으로 돌아가 우리가 우리의 생활태도와 마음가짐을 새로이 해야될줄 믿는다.
끝으로 한국에 가족계획의 선풍이 일어난지 불과 몇해동안 한국사회에 오점을 남긴것을 한가지 말하고 싶다. 그것은 젊은 남녀들의 정조남용이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의 성관계가 타락일로를 걷고 있다. 그것의 중요 원인은 가족계획에서 찾아온 그릇된 성남용에서 연유된 것이다.
한국의 인구문제는 물론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외국의 경우를 맹종하는 근시안적인 모방을 떠나서 좀 더 대국적으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국토 개발이라든지 이민정책이라든지 기타 산업증산이라는 건설적인 길로 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