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第一聲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테오 4,17)
예수님의 첫 설교이 제일성(第一聲)이었다. 에와의 교오(驕傲)로 원죄의 굴레를 쓴 인류를 어두움에서 건져내기 위해, 겸손한 새 에와의 몸을 거쳐 이 세상에 오신 구제주는 그 공생활 벽두(劈頭)에 당신이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음을 이같이 천명(闡明)하셨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사순절에는 이 말씀에 더욱 간곡한 「부르심」이 곁들여진다. 어서 오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이 그리스도의 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영혼에 묻은때와 먼지를 깨끗이 씻고 낡은 자기(自己)」를 벗고 「새로운 자기」를 입는 재창조(再唱創造)의 시기가 곧 사순절이다.
실로 구원의 시기요 성총을 받을 만한 때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란 그리 손쉬운 것이 아니다. 개과(改過)하는 마음은 천주께서 주시나 회개 행위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성전에 올라가 제대 앞에 버티고 서서 『나는 강탈,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또 이 세리(稅吏)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매주 두번씩 엄재를 지키고 또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나이다.』하고 자기의 공덕을 양언(揚言)한 저 「바리세이」의 불손(不遜)을 우리는 비웃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바리세이」가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이 내적 「바리세이」(사욕 편정)는 한술 더 떠서 요즈음 세태(世態)에 발맞추어, 우리로 하여금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앙」이니 「양심」이니 「사랑」이니 하는 낱말들을 입으로만 공수표(空手票)처럼 남발(濫發)케 한다.
우리는 이 내적 「바리세이」를 제어(制御)하고 먼저 자기가 죄인이라는 절실한 자각을 가지고 천주 앞에 엎드리어, 천주께서 흡족해 하실 만큼 슬퍼해야 한다. 감시 하늘로 눈도 들지 못하고, 『천주요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통회의 몸부림을 친 저 세리를 본받아 『낡은 자기』의 마음을 부수고 묵은 넋을 꺾어야 한다. 그리고 보속과 고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입어야 한다.』
확실히 회개는 좁은 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을 거쳐야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주는 마음이 부서진 자를 가까이 하시고 넋이 꺾인 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성영 33,19)
■ 나그네살이
『내가 나그네살이하는 햇수는 백 삼십년이오나 나의 생명의 햇수는 짧고 불행하와 나의 조상들이 뜨내기로서 살던 햇수에는 미치지 못하나이다.』 (창세기 47,9)
에집트로 이주한 야곱이 궁전에 인도되었을 때 나이를 묻는 파라오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조(聖祖)들의 나잇수에 용훼(容喙)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말은 「나그네살이」 또는 「뜨내기」라는 낱말이다. 이것은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종도께서 풀이해 주고 있다.
성조들은 천주께 받은 약속의 실현을 보지못하고서도 신앙을 가지고 죽었다. 생전에 먼훗날 올 것에 희망을 두고 충심으로 천주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자기들은 이 세상의 나그네요 뜨내기임을 기꺼이 고백하였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다면 다시 그리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나은 본향 곧 천국을 동경했던 것이다. 우리도 틀림없는 뜨내기요 나그네이다.
그러나 성조들처럼 이 사실을 실감(實感)하지 못한다. 그만큼 신앙이 약하다는 말이 된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신자로서 자기가 선 위치에 대한 의무와 자기가 가야할 지표(指標)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다듬어 굳히는 시기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성교회와 함께,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바라고, 만물 회복의 달을 그리며 천주의 나라를 향해 순례(巡禮)의 길을 가는 나그네들이다. 고독하지 않은 영광된 나그네들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 이 순례의 길을 가 주시기 때문이다. 또 주님과 함께 가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金允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