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틀림없이 오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라도 그순간이 오고보면 그것이 뜻밖의 일같이 생각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긴급한 일에 몰두하고 있을때 오는 것이다.』 이 말은 엘리옽의 희곡의 주인공 「칸타베리」 대주교의 말이다. ▲강론의 첫마디 『로마 교황청은 한국에 마산교구를 신설하고 그 교구장에 가톨릭시보사장…』 이렇게 해서 그 사실은 틀림없이 오리라고 예기했으면서도 이 엄숙한 선포는 뜻밖의 사실처럼 가슴에 쩌릿한 일격을 가했다. 참으로 그 한가지 사실이 한꺼번에 기쁨과 슬픔을 몰아다줌으로써 잠시 착잡한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 바깥은 봄비라기엔 너무도 시린 찬미가 억수로 내리고 있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역시 같은 시인의 이런 시구를 문득 떠올리면서 꽃샘이라기엔 너무도 괴팍스러운 이 봄은 「시보사」를 위해서 참으로 잔혹한 계절이구나 하는 우울한 생각에 묻혀 비속을 걸어갔다. 진정 한국교회의 영광된 앞날의 발전을 위해, 또한 그 어른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도로서의 고난과 더분(與) 영광된 운명 앞에 우려의 마음 속 기쁜 환호성을 금치못하면서도 사(社)를 위해 또한 단지 인간적인 석별의 정만을 이토록 아쉬워 해야 하는가? ▲시보사에 오신지 1년 10개월, 김 신부님은 그야말로 모진 강행군을 시작하셨다. 몇날 밤을 새워 앞으로 완강히 나아가던 그분의 뒤를 우리 졸병들은 우리의 짐조차 그의 등에 모조리 지우고 황황히 뒤쫓아가는 행상이랄까? 참으로 그 어른의 행보는 어떤 불가능의 상태가 우리의 현실에서 가능으로 전개되던 그런 경의로운 전진이었다. ▲밤을 세워 신관이 부숙부숙하시어 출근한 아침이 몇날이던가? 이렇게 혹사에 시달리면서도 언성한번 높인 일이 없으셨고 아랫사람에게 너무도 자상하게 심령으로 물질적으로 어버이, 형제가 되셨다. 우리들은 너무도 그 어른의 힘과 의지에 멋모르고 푸근히 기대어 왔는가 싶더니, 이제 어디만큼 왔기에 눈을 뜨고 우리만 가라하시는가. 아직도 봄의 잔혹한 날은 요원하건만 그분과 함께 온 『겨울은 차라리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엘리옽 · 황무지 일절) 울먹한 심사를 주체할 길 없으나 천주의 섭리를 감사할줄 알진대 『비겁한 근심에 싸여』 있을게 아니라 『최소한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우리의 착하신 주교님을 진심으로 환영해야 할 것이며』(엘리옽 대승정에서) 우리의 모든 정성을 바쳐 풍성한 성총이 우리의 사장이시던 김 주교님께 내리길 기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