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제학자들이 UN의 각종 통계를 토대로 연구한 결과를 들어보면 전 세계 인구를 4등분하여 그 첫째 분 4의 1은 너무 부유하여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물질적인 과잉 소유로 그 물질이 인간을 죽인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세상에는 배가 너무 불러 죽어아고 있는 사람들이 전 인류의 4분의 1인 엄청난 숫자라는 것이다. 실로 놀라운 숫자라 하겠다.
그 다음 4분의 1은 충분한 소유로 지상의 생활을 즐기며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소위 여유있는 사람들에 속하는 부류인 것이다.
세째는 자기의 노력으로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생활에 여유가 없으니 항상 불안하고 그 일을 쉴 수가 없다. 소위 말하는 소시민(小市民)이다.
마지막 4분의 1의 인류는 가난과 굶주림으로 현재에 죽어가고 있다는 결론이다. 세상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네 사람중에 한사람씩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통계적 결론은 우리 한국에도 적용된다. 우리 동포의 4분의 1은 배가 너무 불러 죽어가는가 하면, 바로 그 이웃에서는 굶어, 현재에 죽어가는 사람이 전인구의 4분의 1이나 된다. 보통으로 한국은 가난한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한국은 결코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무엇이 결핍된 나라이다. 그리싀도교적 애덕이 결핍된 나라이다. 사랑이 없는 나라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 온 국민이 한결같이 그리스도교적 애덕을 진실로 실천한다면 한국에는 굶주리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통계숫자나 경제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주께서 주신 그 넉넉함을 악용하여 스스로의 생명을 해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또 한편 얼마나 많은 사라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가를.
가난이 죄라고도 한다. 모든 불행이, 많은 사회악이 가난에서 시작되지 않느냐. 굶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굶는다는 것은 영혼마저도 죽인다.
더우기 내 사랑하는 자식들, 사랑하는 아내, 일가 친척들이 굶고 있다는 것은 내가 굶는 것보다 더욱 괴로운 일이다. 형제들의 가난과 굶주림을 외면하는 것은 「남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할 그리스도의 백성이 아니다. 국민 한사람이 피살되면 신문들이 대서특필하고,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범인 체포에 나서고 온국민들은 관심을 모아 이 사실을 화제에 올린다. 그러나 국민의 4분의 1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가난과 굶주림에 귀한 생명을 깎고 있는데도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인간이 살고 있지 않는 황무지요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의 광야에 불과하지 않느냐.
천주님이 내려다 보실 때는 부유하나 굶주리나 모든 인류는 자기의 아들이요 딸들이다.
우리들은 한 동기간이다. 동기간에 우애가 없고 사랑의 결핍으로 인하여 그 형제중 하나가 죽을때 아버지 되시는 천주님은 우리에게 무어라 말씀하시겠느냐. 20세기 후반에 와서 세계적인 관심사요, 세기적인 과업은 지역사회개발(地域社會開發)이요, 저개발(低開發)국의 원조다. 이 운동의 제창가요 지도자는 다름아닌 고 요안 23세와 현 교종 바오로 6세다. 바오로 6세께서는 최근 인도와 파키스탄의 수백만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시며 160만불의 구호금 모금운동을 시작하시는 한편 『신음하고 우는 사람이 있는 곳, 굶주리고 죽는 사람이 있는 곳』에 그 마음이 고착돼 있다고 견딜 수 없는 고통된 심경을 밝히시고 『이들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모든 인간 관계가 긴밀해진 오늘날에 있어 아무도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고 헐벗고 있는 줄을 몰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누구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을 도울 만큼 넉넉하게 가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실질적인 그리싀도교적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시며 우리들의 잠자는 애덕심을 일깨웠었다.
교종 바오로 6세의 최근의 동향을 보면 기회있을 때마다 한번도 빼지않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므로 그리스도교적 애덕실천을 호소하고 계시는데에 우리들은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매일 아침 미사참례하는 사람은 많아도 굶주린 형제들 도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노동자를 혹사해서 치부하여 문화사업에 투자하거나 교회를 짓는 사람은 있어도 굶주린 사람을 찾아 음식을 나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환자에게 진찰료와 치료비를 받아 거대한 병원 빌딩을 짓고 교회당을 지어 만족하는 사람은 있어도 교회아래 굶주리는 사람과 가난으로 말미암아 의료의 혜택을 받지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관심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지 않다.
현시, 세계이 유행어는 『보다 잘 살자』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더 잘살기를 바라기 전에 우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지 않기를 바라야 되겠다. 보다 더 잘살기 전에, 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해야 하겠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헐벗고 거리를 방황하며 애걸하리라. 헐벗은 나를 보라. 이 굶어죽어가는 너희 형제, 이 사람에게 한톨의 쌀을 줄 사람은 없느냐. 나를 보고 「주여」 「주여」 하지말고 천주의 모상인 너희들의 형제를 먼저 구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