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탄과의 長期戰
『마귀가 돌아와 보매, 그 집을 비질하고 꾸몄는지라,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마귀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기기 거처하매, 그 사람이 나중은 처음에 비겨 더 언잖으리라.』 (루까 11,25-26)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유데아민족의 종교생활은 율법학자들의 지도하에 쇄신되었다. 제반 의식(儀式)은 더욱 엄격해졌고, 선업(善業)의 여행(勵行)이 강조되었다. 우상들은 파괴되고 「이스라엘의 집」은 사탄이 폭정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입술과 겉치레의 신앙을 좋아하지 않는 저 「천주」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씨아는 마침내 와서 이 집에 그 「천주」(내적 신앙)를 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메씨아가 「선민」에게 특혜를 베푸는 정치적 메씨아 되기를 거절한데 앙심을 품고 천주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사탄의 폭력이 편승(便乘)하기 좋은 아집(我執)이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하신다. 우리도 이따금 아집을 부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성세 때 우리에게서 쫓겨나간 사탄은 전보다 더한 증오와 광포(狂暴)로 항상 재공략(再攻掠)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우리가 「광명의 자식」답지 않게 「세속」의 유혹에 눈을 팔아 꾸물거리거나, 「사욕 편정」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때, 특히 같은 죄를 되풀이해서 범할 때, 사탄은 우리에게 간악한 탐색전을 벌인다. 사탄과이 싸움은 지루하고 고된 장기전이다. 그와 대적할 효과적인 무기는 본래 우리가 원죄에 물든 타락한 인간으로서 씻음을 받아 재생하였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겸손」과 주께 대한 「신뢰」와, 은총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 그대 이웃은 어디있는가
『너의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뇨』(창세기 4,9)
아담의 맏아들 카인은 천주께서 자기의 제물보다 동생 아벨의 제물을 더 즐겨 굽어보심에 불만을 품고 동생을 시기하였다. 천주께서 간곡히 타일렀으나 귓등으로 듣고 기어이 동생을 들로 꾀어내어 때려죽였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동기로 해서 이 세상에 최초의 죽음이 들어왔다. 그것도 친형제간의 살인이었다. 바로 원죄의 첫 업보(業報)였다.
카인이 그렇듯 흉악한 죄를 저질렀으나 그래도 천주께서는 뉘우침의 기회를 주시려고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넌지시 떠보니 카인은 능청스럽게도 『모르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켜주는 자이오니까?』했다.
오늘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그대의 이웃은 어디 있는가?』 사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를 못할지언정, 이웃의 영혼을 죽이는거나 다름없는 일을 가끔 저지른다.
우리는 천주님의 물으심에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리스도 신자는 천주의 계명을 지며야 한다. 계명을 어기면 죄가 된다. 계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계명을 어기면 죄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다. 공심판 내에도 주로 이 애덕의 실천 여부가 심리(審理)된다.
그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한 이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다음과 같은 반가운 말씀을 들을 것이다. 『내 성부께 강복받은 자들아, 세상이 비롯하였을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와서 차지하라. 이는 내가 주렸을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집에 머무르게 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문명하였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보았기 때문이니라.(마테오 25,34-36)
金允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