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고상을 우러러 성신을 받들어 모실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 마치 창조주가 스스로의 모습을 만들어 생기를 불어넣어서 인류의 원조를 창조했다는 이치를 깨닫기까지의 시일이 필요했듯 말이다.
『쇠는 불에 들어가 단련이 될수록 강철이 된다.』했다. 과연 나의 신앙도 그와같이 불에서 굳어지려는지? 그러한 가능성에 매달려 꽤는 험한 길을 걷고있는 셈이다.
상생의 현의에 집념해 아직도 「삼위일체」의 참뜻을 추구하고 있다면 어쩌면 「성 아오스딩」을 본받아 성세명 마저 그를 따른 것 같은 오해를 받기가 첩경일게다.
연이나 __것은 어디까지나 종교를 알고 또 그 믿음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소단이 아닐 수 없다. 종교의 진리가 참으로 심오한 것이라 할진대 평생을 두곤들 어찌 다 그 참뜻을 깨달을 수가 있을까마는 10대로부터 근20여 성상을 두고 평신도로서 거의 여구단계에 이르기까지 추구해 이제 겨우 성전의 문턱에 다다른 느낌을 가지게 된다면 자못 이것은 집요하고 진지한 생활태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지나온 신 · 구 신앙생활을 돌이켜 볼 때 실로 부족하고 미흡했던 점은 이후 헤아릴 수 없거니와 그중에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은 그 매말랐던 심령으로 하여금 따뜻한 「사랑의 대화」가 요청됐던 것이라 하겠다. 좀더 부드럽고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주성신의 소리를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주성신의 소리를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러한 따뜻한 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십자고상을 우러러 볼 때마다 알지못할 「고로움」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그 「수난의 고로움」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고로움」, 어쩐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대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이 완전히 가실때까지는 나는 아직도 적지않은 시일을 기다리고 있지 안으면 안되는 것이다.
「영원의 메시아」는 믿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할진대 「삼위일체」 또한 지어진 위격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하겠다. 가장 다급할 때 어머니를 찾듯이 깊은 속참 마음으로부터 자기 「주」를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참다룬 신앙을 가져야 하겠다.
이제 개종의 마루턱에 서서 새삼스러히 느껴지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주성신과 더불어 따뜻한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아쉬움을 절절히 느끼며 잦으나마 마련된 「믿음의 발판」 위에서 또 한층계의 「성전으로서 계단」을 조심스러히 내디디면서 중언부언 개종의 소감을 엮어볼 따름이다.
李龍周(원주시 원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