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답한 포도위에 소년이 고개를 탈아붙이고 쪼그리고 앉은 곁에 마치 원래부터 오라비의 몸둥이에 붙어있는 것처럼 어린 계집애가 웅그리고 죽은듯 누워있다. 그앞에 순박한 시골부인네가 치마를 들치고 주머니끈을 풀면서 연신 혀를 찬다. 『그래 이것들아 이러구 앉아 있으면 우얄것고, 밤에는 어디서 자노?』 여인은 오누이의 불쌍한 정상에 어쩔 수 없는 연민을 느끼면서 일변 도시인들의 몰인정에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모양이다. ▲인구증가, 경제불안 등으로 거리엔 날로 행걸자가 불어나고 이들은 이미 정상한 사회인에서 탄락된 처지면서도 생존 유지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길녘마다 행인을 가로막고 적선을 강요하다가 연극을 부리고 이제는 이 연극조차 너무 흔하고 경연자가 생겨 효과가 없다. 오만 궁상을 다 떨고 앉은 어린 거지 앞에 놓인 양재기안엔 누구 말처럼 일전짜리 휴메니스트 몇이 지나갔다는 표적 몇개. ▲혹자는 이들을 동정함으로써 그들의 나태나 기만적 의존성을 조장한다고 하고 그런 값싼 동정은 센치한 휴메니스트나 할짓이라고 비꼰다. 적전을 간청하는 거지에게 한푼없음을 사과하면서 악수했을 때 돈보다 오히려 더 큰 위안을 받게했다는 뜨르게네프의 일화는 현대엔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선심이 될지. 이즘의 걸인은 차라리 모욕적인 적선일망정 진정한 마음의 동정보다 돈을 훨씬 달갑게 여길지도 모른다. ▲허지만 그것이 가증할 연극이든 어쨌든간에 그들의 현실이 비참하고 굶주린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들은 거의가 어린 것들이고 또 이건 어른들의 강요일는지 모른다. 또 인간도 너무 빈궁하고 무지하면 비열하고 파렴치해짐도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진실한 현실」에 동정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의 수단에 분개하고 혐오를 느끼고 그리고 이내 무관심해질 뿐 아니라 자신의 냉정에 적당히 합리화까지 한다. 연극이 어디까지 연극이면서도 인간의 진실한 일면을 표현하는 것처럼 거지의 형상은 꾸밈이면서도(결코 정당화할 수는 없을망정) 그러나 진정한 자기 표현인지 모른다. 현대 우리는 「스크린」에 나타난 비극보다 거리의 이 현실적인 비극에 대해 훨씬 무감동하지 않는가. ▲이렇게 사람들은 인간의 어떠한 형상에도 연민을 못느끼는 만성 애고이슴으로 굳어져 간다. 이들 존재가 어차피 부조리한 사회의 필연적인 소산일진대 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보다 적극적인 구호를 베풀어야함은 비단 국가만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 가질 본질적인 인간애가 아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