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主教會議에 期待 / 韓바오로(전주 전동교회)
『보리야 어서 자라거라』하며 고사리 같은 두손을 모으는 애절한 모습이 있는가하면 특혜와 직과 부정의 악순환이 우리의 현실이다. 게다가 과세도 없이 들어온 못된 유행과 부도덕한 풍조들. 그렇다고 여기서 우리의 비참한 꼬락서니만을 그려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지러운 사회에서도 남달리 그리스도의 보화를 한푼 두푼 또는 다섯푼씩 받은 우리들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해보자는 것이다.
구원없는 시간을 무표정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버림받은 이웃에게 주어야할 무엇을 우리는 받았다. 부정부패 타락도 막아야겠고 이웃돕기, 청소년선도 반공, 사회정화 이 모든것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리의 일이 아닌가? 실의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표를 주고 저들에게도 내일이 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대오(隊伍)를 정비해야겠다.
어둠속에서 등불이 뒷전에 처져서야 어떻게 그 구실을 하겠는가? 지난번 주교회의의 결정사항을 보고 7월에 속개될 주교회의에 기대를 거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 消極的 言動 / 黃도밍고(여수 동산동 천주교회)
이즘 청소년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는 퇴폐적인 사고와 행동내지는 언어에 이르기까지 어떤 위기에 이른 느낌이 없지 않다.
차제에 우리 가톨릭교인은 이런 사회도의의 저락에 어떤 책임이나 의무를 느끼지 않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톨리시즘」을 완전히 보급시켜 사회개선 사회청조(淸潮)의 기풍을 진작시킬 의무가 있다. 혹자는 하나의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일소에 붙일지 모르나 가톨릭의 이러한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무시하고서는 우리의 본래적인 사명인 인류구원도 결국 하나의 공수포에 불과한 것. 그리하여 성당을 처음 찾는 외인들에게 우리는 진정으로 대하여 깊은 인상을 주어야할 것이다.
백척간두의 정신적 위기에 처한 현대인의 마음에 평화와 신념을 주는 길은 「매스·콤」등 시의에 적합한 전교방법을 통한 「가톨리시즘」 보급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 어떤 從軍神父 / 양철완(육군 제6856부대 군종과)
나의 군대생활 중 군인교회에서의 한 신부님께 반은 정신적 내지 신앙적 강화는 내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저표가 되었다. 그분의 미소짓는 얼굴, 부드러운 음성, 겸허한대도 잘못을 관대히 용서하시는 그 인간애에서 참된 성직자의 모습을 엿볼수 있었다. 시간이 있을때마다 많은 청년장병들은 상하차별 없이 신부님을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교리를 토론하고 인생을 이야기했으니 그 시절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따뜻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는 불우한 사병을 힘있는데까지 도와주고 모든 불우한 인간들의 사정에 중심으로 귀를 기울였다.
훈련중에 신부님을 모시고 깊은 골짝이에서 야외미사를 드릴때의 그 감개무량, 우리는 청춘의 몸과 마음을 함께 바쳐 천주님께 조국을 위해 충심으로 기원했다. 이제 얼마남지 않는 군대생활, 비록 고달펐으나 신부님과 전우들을 생각하면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여 이글을 쓴다.
■ 神父와 親切/ A 生(全州金堤)
어느날 열차칸에서 마주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대방이 필자가 교우라는 것을 알자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해왔다. 『천주교회 신부는 본시 그렇게 거만한 사람들입니까?』 『글쎄요,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인지…?』 필자의 좀 당황한 반문에 그의 대답은 이렇다.
어느날 외교인인 그가 무슨 용건으로 모 신부님을 찾아갔더니 어디서 왔어, 무엇하러하는 식으로 옳게 상대도 않고는 침실인지 성당 안인지 들어가면서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종래 생각해오던 신부란 존재는, 항상 인자하고 친절하며 슬기로운 사람들로 알고 있었는데 이 너무나 어이없는 인간대접에 아연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그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니요. 신부 또한 각기 개성이 다른 한 인간인바에야 그들이 신부님을 지나치게 비인간화하여 신성시했던 선입관부터가 잘못된데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이미 외부로 부터 한두번 들은것도 아니요. 일반적으로 교우들간에도 허다한 불만이고 보면 단순히 인간적인 이해만으로만 끝나지않는 우리교회 자체의 본래적인 의미마저 흐리게 하는 어떤 문제가 아니될지?
■ 放送局 建立 / 姜발바라(청량리 본당)
일전 가톨릭시보 「디알로그」 난을 통해 방송국건립에 대한 글을 읽고 깊은 공감을 가진다.
나는 직업여성으로 세딸의 어머니로서 덧붙이면 혼자 있는 외로운 여자로서 오래전부터 이러한 교회기구를 열망해왔다.
평일미사와 주일미사에서 물론 영혼의 양식을 얻는다고 믿으나 돌아서면 외롭고 각박한 현실속에 눈에 띄고 귀에 울리는이 그 퇴폐적인 오락영화, 가요, 「라디오·드라마」의 범람이니… 높은 곳을 향해 스스로 불러보곱은 성가와 그 말씀이 이 듣고싶을때 항상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우리에겐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값진보화가 마음속에 있지만 그것을 뺏기지 않고 잘 간직하기위해 또한 끊임없는 외부의 공세를 막기위해 현대적 무기는 꼭 필요한줄 안다. 자녀와 가정살림에 일손을 멈출틈없는 주부들, 어린이들의 정서교육을 위해서도 주님의 말씀은 항상 귓전에 메아리져야 될줄 안다. 이것을 우선 주일 하루만이라도 실시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