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미색의 기쁨
『주의 집으로 올라가자』(성영 백21,1) 「보속」이나 「고행」이라는 말은 가끔 우리에게 뭔가 짐스러운 것을 느끼게 한다. 우리 머릿속에 속바칠 속(贖)자와 쓸 고(苦)자에 대한 어떤 고착(固着)관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속죄적 고행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일치하는 성화(聖化)작업이다. 고되긴 하나 영광스러운 작업이다.
우리는 보속과 고행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한 바오로 종도와 같이, 주님의 상처의 표인(標印)을 우리 몸에 받아, 주님과 함께 죽고 묻혀야 한다. 그래야만 주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약속의 자녀」로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멀고 가까운 산들에 춘색(春色)이 서려간다. 얼마 안있으면 당천둑의 잔디에는 다시 푸른 기가 돌게 될 것이고 클로버는 조심스레 눈엽(눈葉)을 펼것이고 오랑케꽃은 양지바른 논두렁 밑에서 연보라빛을 봄바람에 하늘댈 것이다. 우리는 동면에서 소생하는 이런 것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반가운 기별을 듣는다.
이 기별에 때맞추어, 사순절 네째 주일에는 사제들이 장미색 제의를 입고, 신자들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
그 제의의 장미색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는 모든 크리스챤의 기쁨이 봄아지랑이처럼 나부낀다. 독서는 우리가 공포와 속박의 밤을 보내고 자유와 사랑의 날을 맞는 「약속의 아들 딸들」임을 일깨워 준다.
또 복음 말씀에는 성체적(聖體的) 향기가 훈훈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앉게 하라』고 하신다. 풀밭 아닌 당신의 집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우리 옆에 앉히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하늘의 만나(성체성사)를 우리만이 아니라 만인이 받아먹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내일,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데리고 「빵의 기적」이 되풀이되는 주의 집으로 모셔야 한다.
■ 살심장의 겸손
『너희 안에 새로운 얼을 넣어, 너희 육신에서 돌심장을 꺼내고 살심장을 주리라』(엣제키엘 36,26)
성세때 우리는 살심장(부드러운 마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심장은 우리가 항상 「마음으로 가난하고 겸손해야만」 피가 통하고 따스하다. 우리가 「묵은 사람」의 버릇을 되살려, 다시 목덜미를 뻣뻣하게 굳혀가지고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신적(神的)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에만 애착하고 볼 수 없는 것보다 볼 수 있는 것에만 정신을 팔고, 내세의 도시보다 현세의 일에만 골몰할 때, 이 심장은 길바닥에 버려진 사과껍질보다 더 흉하게 쭈글쭈글 오그라들고만다. 피(성총)가 고갈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천주께서는 「다위」왕과 같이 『내가 주앞에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영세당시의 겸손을 되찾는 영혼에게만 피를 다시 공급해 주신다.
예수께서 『내 멍에를 메며, 내 마음이 양선하고 겸손함을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종도들은 이 가르침을 받들어 주님과 함께 기꺼이 『세상의 쓰레기가 되고 모든 이의 찌꺼기가 되었다.』 천주께서는 진실로 겸손한 자들에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어떤 교부는 말했다. 『전능한 이는 하나뿐이 아니라 둘이있으니 곧 천주와 겸손한 자이다.』
이제 우리는 영세 당시를 회상하며 여느때보다 더 겸손되이 천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보속과 기도에 전렴하면서 「바스카」신비를 맞을 준비를 해야한다.
金允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