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신적 여유도 없을 임종의 단말마 속에서 자기 신념을 피력하고 인간에 대해 깊은 사랑을 금치 못한 위대한 인간이 우리시대에 있다. 그는 만 사흘동안 풍전등화처럼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자는 일치를… 일치를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한 교회와 인류역사에 전환점을 이룩한 요안 23세이다. ▲이 이야기는 지난번 프로테스탄 여성단체 대표와 가톨릭대표들이 「에쿠메니칼」운동의 일환으로 모인 회합에서 한 신부님의 강연중에 나온 일화다. 「바티깐」 공의회 이후 「일치」란 언어와 그 진정한 개념이 뚜렷하고 직접적으로 우리 가운데 대두되었으나 그들을 열교(裂敎)라고 부르는 대신 「갈려진 형제」라고 부르는 지금에 와서도 말만으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실제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을 초대하고 대화해보라. ▲쌍방이 교역자들의 강연을 통해 또 직접적인 토론과 대화를 통해 여태까지 사회도처에서 미신자 이상으로 적개심을 품고 반목 암투했던 행위가 그 동기를 캐어보면 어떤 근본적 차이에서 이성이나 이론에 근거를 두었다기 보다 훨씬 더 인간적 감정의 소치였음을 개닫게 되리라. ▲실사회에서 크게 혹은 소소히 대립했던 주체적인 경험담을 털어놓고 이야기했을때 피차 편협하고 거의 치졸한 인간적 소행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고 나중엔 서로 폭소를 터뜨릴 지경이었다. 허지만 생각하면 그리스도는 처형될 절박한 시기에서까지 너희는 하나가 되라, 당부하셨는데 이를 배반하고 피흘린 어리석은 싸움을 자행했으니 우리는 진정 눈물을 흘려 참회를 해도 여한이 있다. ▲신학자 발트가 「에꾸메니슴」은 금세기에 허락된 성령의 역사(役事)라고 했다면, 요안 교종의 임종의 단말마로 체현한 일치에의 간절한 염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며칠전 바오로 6세께서는 람세이 대주교와의 역사적 회견이 끝난 후 평화의 포옹을 나누고 갑자기 그 손에 낀 「에메랄드」로 장식된 금강석 반지를 뽑아 「람」 대주교의 손에 끼워주었다. 이는 형언할 수 없는 당시의 통절한 감회를 교종은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세는 일치에로 기울어졋다.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신자가 자가당착과 위선과 아집의 허울을 벗고 이 세기적 정신에 자각하고 이를 실현하는데 있다. 전기한 양 교파의 선구적 여성의 일단은 아침부터 함께 담소하고 식사하고 또한 간절히 기도했다. 진복팔단, 주기도문(천주경)이 그레고리안 합창으로 은은히 퍼지는 가운데 어느듯 창밖엔 붉은노을이 찬란한 축복처럼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