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를 받은지 벌써 수년이 되면서도 나는 늘 묵주신공을 게을리해왔다.
간혹 가톨릭 선배인 내 처에게 핀잔이나 먹으며 남편의 위신상 할 말없이 신공을 드리곤 했다. 나도 그 필요성을 안느끼는 바는 아니다.
하루종일 개나 말처럼 세상사에만 목매는 끌려다니는 고달픈 중에서 자기 자신을 되찾고 기구하며 삼매경(三昧境)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인지 나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기에 늙은 할머님들이 낡은 묵주가 닳고 손때가 올라 윤이 나는 묵주를 갖고 계신 것을 보면 그 묵주가 몹시도 부러웠다. 내 묵주는 언제보아도 새것같이만 보이고.
그러던중 작년 4월달이었던가 우리 본당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의 총장신부님이 「로마」 에서 오셨다가 가시는 길에 나도 수영공항까지 전송을 나갔다. 시간이 꽤 많이 남아서 무료한 김에 총장신부님께 『비행기 타시는 시간이 길어서 퍽 지루하시겠읍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님은 대답은 안하시고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가죽지갑을 하나 꺼내신다. 키가 크신 신부님은 허리를 굽히시고 그안에 든 것을 보이시고는 빙긋이 웃으신다.
이심전심으로 저도 알겟다는 뜻으로 나도 빙긋이 웃어뵈었다. 그안에는 내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묵주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후부터 나는 총장신부님의 본을 따 여가를 이용해서 어디서 아무때나 묵주신공 하는 습관을 붙이기에 노력했다.
버스나 합승을 타면 곧 묵주를 꺼내 조용히 신공을 시작한다. 때로는 번잡한 거리를 달리는 차 안이 조용한 집안보다 더욱 조용해 보이고 마음이 가다듬어진다. 차안에서 신공을 드릴 때 묵주를 남이 보란듯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남이 본들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태도다. 길거리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보다는 좀더 좋은 전도가 되지 않겠는가. 나는 자부심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남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내 자신을 알고 나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좀 더 시급한 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너무 고식적인 생각일까? 여하튼 세상사의 잡념을 버리고 묵주신공을 하는 순간이라도 주님과 성모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같이 있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李在夏(부산 대연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