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산들이 많다. 만주나 미국의 끝없는 지평선을 보고 가본 사람들은 답답해서 못견딘다. 산도 깊다. 그중에도 竹嶺, 문경새재, 전라도 무주 구천동, 강원도의 飛行재, 두만동 고개 등. 운전수와 조수들이 이 재를 넘기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헨들」과 「브레이키」를 잡았다 놓았다 한다. 그런데 5월 중순인 지금도 이 높은 산들엔 봄이 오지 않고 있다. 많지도 않은 초목들이 푸른 옷을 두르지 못한채 낙엽들을 이고 있어 앙상하다. ▲공의회는 교회에 새 기운을 불어 넣었고 새 봄을 갔다 주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도 이 봄이 오고 있다. 세계도처의 교회들에 오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두만동 고개의 봄은 제철이 되면 영락없이 골고루 온다는데 공의회의 봄인, 각성과 쇄신 그리고 현대에 적응하려는 활력을 줄 「봄」은 한반도 남쪽, 이 좁은 지역에 골고루 오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교구서는 공의회 계몽강연이 열을 띠고 어떤 곳서는 잠잠하다. 심지어는 『공의회 강연이 무엇이냐』고 반문도 한다. 제대가 신자들을 향해 있지 않은 것이 불법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으나 이렇게도 모두가 꼼짝않고 등을 진치 그냥 있는 곳도 있다 ▲『교회의 문은 활짝 열렸다』고 세계가 환호를 하는데 육중한 문엔 오래된 먼지가 쌓인채 굳게 닫힌 곳이 아직도 있다. 주일날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문을 박차고 나가는 습성이 마냥 계속하고 미사가 끝난지 반시간이 체 못되어 산중의 별장처럼 조용해진 성당이 많다. ▲주일 애긍이 1백원을 넘지 못한 곳이 수다하고 미사참여자의 반을 남자들이 채우지 못하는 것이 현상이다. 왜 그럴까? 공의회는 「천주의 백성」이란 낱말과 함께 평신사도직을 강조했다. 한국신자들의 생리가 「천주의 백성」 안에 자기를 투철하게 발견 못하는 것이 큰 원인인 것이다. 신앙은 천주님 앞에 完德하려는 「나」를 보이는 해우이이다. 멸시의 대상이나, 무력한 나를 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천주의 백성인 평신도는 어느 누구보다 떳떡하고 으젓하고 슬기롭고 훌륭하고 착한 나를 요구한다. 교회는 미천한 복사 회장을 기르는 곳이 아니다. 인권과 인격을 승화시키는 곳이다. 보장하는 곳이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일반사회인에 비겨 손색이 없는 대우를 하는 「천주의 백성」이며 평신도이어야 한다. 입교전은 상전 모시듯, 입교후는 엄친슬하격(格)의 처우를 하는 것이 가톨릭 교회가 아니다. 「봄」을 재촉하는 길은 여기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