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순교자」란 소설이 영화화됨으로 이 작품의 사상적 배경이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작품의 문학적 평가는 차치하고 그것이 제시하는 「휴메니즘」의 타당성 여부에 대하여는 우리 역시 특히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전쟁과 죽음 모든것이 무너지고 파괴되는 그 폐허속에서 주인공 신목사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의 영혼은 신(神)을 잃은 암담한 절망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진위조차 초극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비참의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그 자신은 이미 믿음을 잃은 신과 그리스도, 육신부활, 영생 등을 유일한 또 최후의 희망으로 설교한다. ▲얼핏보면 이 작품은 신의 존재, 내지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작품이 표방하는 「휴메니즘」은 실은 그리스도교의 그것과는 완전히 상치돼 있다. 그것은 원작자 김은국씨 자신의 말 그대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하는 문제는 중요치않는 말하자면 세속적 「휴메니즘」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신이없이도 성립할 수 있는 무신론적 「휴메니즘」이다. ▲신이라든지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맑스」 주의자들의 말과 같이 여기서도 인간고뇌를 잠시 덜어주는 마취제적 아편에 불과하다. 그것은 결코 인간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맑스」 주의와도 다르다. 왜냐하면 「맑스」 주의적 「휴메니즘」은 비록 이승에 불과할 지라도 지상천국이 이루어질 「미래」를 믿고 그 미래에 대한 희망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작품 「순교자」의 「휴메니즘」은 어떠한 「미래」에 대한 신앙도 없이 허무한 절망뿐이다. ▲주인공 신목사를 작품은 그리스도와 같이 인간을 위해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성스러운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신목사의 사랑의 십자가에는 구원이 없다. 구원이 없다는데 오히려 그는 그의 절망의 십자가의 의미를 찾고 있다. 일종의 허무주의적 영웅주의의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결국은빛도 의미도 없고 모든것은 죽음과 무(無)에 끄치고 만다. ▲그렇다면 이같이 구원의 길이 단절되고 내일이라는 미래도 없고 무(無)만이 남은 절망의 절벽위에 「휴메니즘」이란 도대체 성립될 수 있는가고 반문치 않을 수 없다. 의미 없는 「휴메니즘」 그것은 완전히 부조리(不條理)의 「휴메니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