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가 보면 여자들 때문에 일을 망쳐놓기도 하고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수도 많다.
인류가 찬란한 문화를 이룩해 놓았다고 자랑하는 역사를 보더라도 여성들이 저질러 놓은 실수가 얼마나 많으냐? 우선 우리의 조상 에와 할머니만 하더라도 젊었을 한때 엉뚱한 짓을 해서 모처럼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창피를 당하게 하고 아담의 체면을 심히 손상시켜 패가망신케 해서 오늘날 억만대 후세에까지 이처럼 일을 어렵게 만들어 놓지 않았나? 이런 이야기는 비단 창세기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자유당 때만 하더라도 치맛바람 때문에 국사를 망쳐놓았다고도 하지 않느냐? 그러나 에와가 한 일이 누구를 위한 일이며 세상에 많은 「치마」들이 누구를 위하여 바람을 휘날리느냐 하면 그것이 다 「남편」의 출세를 위한 일념이었을진대 여성들이 더러는 실수도 했지마는 결국 남편들은 여성덕분에 큰 소리를 칠 소지를 얻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남성은 여성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고 현재도 앞으로도 영원히 여성은 남성뿐이랴, 모든 인류구원에 교량(橋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궤에테의 명작 「파우스트」의 결론도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인간을 구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에는 여성들의 이름이 의외로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금성경의 필자들은 중요한 대목에는 여성들을 반드시 등장시켜 구원의 여성상(久遠의 女性像)의 본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영원한 약혼녀」로서 또 「영원한 어머니」로서의 귀감이요 상징임은 성경에 역연히 나타나 있으며 또 이미 다 아는 터이므로 다른 몇개의 장면을 살펴 보기로 하자.
예수님이 평화한 가운데 자라 아버지 요셉은 물론 특히 성모님의 큰 사랑이 아닐 수 없었을 때에 처음으로 성모님은 「가나」촌 호인잔치에 초대되어 외출을 하게된다.
성모님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혼인잔치에 장차 인류를 구할 이대한 아들을 앞세우고 만인앞에 처음 나가실 때에 심경이 어떠하셨으랴.
여성의 자랑은 아들이다. 성경에 많은 장면중에 가장 아름답고 또 우리와 가까운 그리고 실감이 나는 장면이 바로 이 「가나」촌 광경이다.
잔치에 제일 귀한 금식은 술이다. 술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고 용기를 주는 음식이다 잔칫집에 술이 떨어졌다는 것은 치명상이다. 즐거움의 결핍을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한 이가 바로 영원한 어머니 성모 마리아였던 것이다.
여성은 즐거움의 결핍이 발견자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주도록 예수님께, 천주의 아들임을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던 성모님은 그 첫번 요구를 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취하고 만족했지마는 그 결핍을 발견한 자는 성모님밖에 없었고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즐거움, 환희(歡喜)의 간구자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신청접수 일자가 되지 않았음에도 「성모님이니까」 들어주셨던 것이다.
성경에는 허다한 남성들이 등장하지마는 그 남성들은 대개 두뇌가 명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천주님을 앞에 두고도 알아 보지 못하고 진리와 사랑을 가르쳐 주고 설명해 주어도 반신반의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직감적으로 예수님이 바로 진리요 사랑이요 빛임을 알았던가. 예수님이 「바리서이」 사람들과 합석하여 음식을 나누고 계실 때 적전지구 출신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즉 진리와 사랑과 광명에 고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 그의 머리칼로 닦고 그 발에 친구하는 장면이 있다.
성경에 많은 장면가운데 가장 황홀한 장면이다 「바리서이」들의 사회, 오늘날의 사회다.
오만불손한 그들은 인간이성을 자랑하고 학문과 사회사업을 논하는 가식의 인간들의 집단이 면서도 눈앞에 있는 예수님을 교만 때문에 눈이 어두어 보지 못했을 때 죄악녀라고 그들이 단죄하고 천하게 여기는 일개 여성은 겸손으로 사랑과 진리 앞에 경배했던 것이다. 여성은 진리와 사랑의 발견자다. 또 하나 여성들로 구성된 극적인 장면이 있다. 예수님이 전교길을 다니시다가 말다와 마리아 형제가 살고 있는 집에 들려봤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모시고 이야기하는데 열중하고 있을때 말다는 음식을 작만하느라고 바쁘게 돌아가다가 마리아가 하는 꼴이 못마당해서 바쁜때는 같이 부엌일을 도우고 나중에 예수님을 모시게 하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더라도 예수님을 혼자 버려둘 수 있느냐 말이다.
말다의 길을 걷는 활동 수도회도 있고 갈멜회처럼 마리아의 길을 걷는 관상수도회도 있다.
성체를 모셔놓고 장시간 관상하는 수도회가 얼마나 필요한지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잘 가르쳐 주시고 있지 않는가. 비생산적이라고 관상수도회를 악평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이 될 것 같다. 세상에는 바빠서 예수님과의 담화를 미루는 사람들도 있고 전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사람만 보면 『믿으라』고 가르치는데만 열중하는 사람들이 많다. 에수님은 3년 평생의 대부분을 천주님의 뜻대로 생활했고 전교는 불과 그생애의 10분지 1도 안되는 3년동안이다. 일하는 것 보다 사업보다 우리의 생활은 천주님의 뜻대로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다와 마리아가 한집에 살듯 활동과 관상생활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겠다.
여성들이 복되도다. 옛날 그대들은 남성의 일개 늑골 조각으로 이뤄졌더니 이제 남성들을 구하며 인류구원이 영원한 상징이 되었도다.
金達湖(本社 論說委員, 慶大文理大學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