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교황 성하께서는 금반 제2차 공의회에 즈음하여 한결같이 신앙쇄신을 내용으로, 특히 평신사도직 수행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괄목할만한 점이다. 아뭏든 일선 교우의 한 사람으로서 양적 가능의 세계에까지 관심하는 구원사업의 목적이 결실되길 천주님의 안배에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공의회에 대한 계몽이 가톨릭 자체내에서 경영하는 「매스콤」을 총동원하다시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오직 교회음악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은 진정 섭섭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음악이 인간의 감정이나 진실의 표현이라면 교회음악이 신앙의 표현으로서 연역(演繹)하는 정리(定理)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더구나 초세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교회음악이 서구의 음악사조를 지배했다는 것은 타사조의 경향과 더불어 역사적 배경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다.
상식에 불과한 얘기지만 음악의 기원이 종교의식에 있었고 또 그 발전상황의 종흔 조건이 그리스도교에 있었다면 과언일가. 어쨌든 교회에 대한 음악의 의의는 크다 하겠다. 이같이 위치가 확고한 음악에의 방관(放觀?)은 후일 기형적인 ㅈ오교상을 초래치 않을가 두렵다. (국내에 한함)
교황 그레고리오 2세께서 정리했다는 「그레고리안성가」가 천오백년이 경과한 오늘날 액면대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놀랍다기 보다 웃을 일이다. 하기야 음악은 시간성을 초월한다고 했다만…? 「라띤」말 미사가 우리말로 거행하는 쇄신이 가능한 것처럼 성가도 한민족성에 알맞는, 그리고 현 시대성에 영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저속화 되지 않는한) 작 · 편곡의 쇄신이 있어야 하겠다.
성가집을 들춰보면 초대교회때의 「멜리스마틱」한 그리고 「살모틱」한 용법에 의한 곡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노래가 마쳤는지 또 계속되는건지 분간 못할 모호한 곡들도 없지 않다. 작곡의 잘잘못을 셈하사는건 아니다. 악보를 대할 때마다 나는 교회음악의 올바른 궤도를 절감한다. 그래 외람된 생각을 해보는지 모른다. 교회음악의 전문적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위해 특수한 교육에의 문을 기대한다.
이문우(울산시 방어2동 307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