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참된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던 장면 박사가 서거했다. 인간을 위해 인간에 종속된 사회를 건설하고 사회생활 속에 자유와 우애(友愛)의 정신을 발전시키고자 투쟁해온 요안 장면 박사는 영원히 잠들었다. ▲그는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는 민주주의, 언론집회의 자유를 통한 민중의 소리에서 새롭고 훌륭한 「아이디어」를 구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그렇게도 혼란한 정치풍토 속에서도 일체의 강권발동을 아예 외면한채 민중의 이성적(理性的) 자각과 이상적인 자유의지에 의한 권리행사를 인내로써 고대하면서, 자연법의 성성(聖性)을 고수한 참다운 가톨릭정치가였다. 『절대복종하라』고 호통치는 전제적인 권력을 단연 배격한 그는 민중과 숨김없이 대화하고자 매주 기자회견을 가졌고 토요일마다 방송을 통해 정무(政務)를 보고햇으며 도시락을 옆에 끼고 등청하는 성실청렴한 집권자였다. 그는 또한 1956년 시공관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한 순간 단상으로 올라가 피가 듣는 손을 들어 혼란한 회장을 제지, 『여러분 안심하고 대회를 계속하시오!』라고 당부하였으니 그의 냉철한 지성과 여유자적한 성품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그는 정계 은퇴후 민주당 정부의 각료 대부분을 영세입교시킨 모범적인 평신도였다. ▲그러나 그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엇다. 그는 4·19의 이념을 계승한 민주당정부의 국무총리로서 민주정치를 원리원칙대로 집행하여 우리 민족사상(史上) 자유와 민주우의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죄로 무능부패란 낙인을 받앗으며, 자유민주를 수호하기 위해 반(反) 독재투쟁과 민권투쟁을 벌인 죄로 인적드문 부통령 공관을 지켜야 해소, 저격까지 당하는 등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했으며, 서거하기 20일 전에야 비로소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가』가 될 자격(?)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속죄의식으로 묵묵히 국가의 장래를 기원하며 사라진 그는 이제 이렇게 노래하리라- 『주께서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쉬운 것이 없어라. 주는 나를 풀밭에 눕게 하시고, 주는 나를 맑은 물가로 데려 가시다. 주는 나의 혼을 다시 살려 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