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교(邪敎) 즉 사이비(似而非)종교내지 유사종교의 신문기사를 자주 읽게된다. 이러한 유의 종교들은 대부분이 미신(迷信)이냐 종교 행위냐를 확연이 분간할 수도 없는 것들이며, 또 이러한 유사종교의 소위 교주들의 비행이 표면화되거나 혹은 그 종교행위자체가 사회에 안녕질서를 크게 해칠 때에 한하여 보도되므로 종교의 탈을 쓴 사교의 수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일부 무지한, 서민층에 국한되어 있고 또 그 종류가 많은 반면, 교세(敎勢)에 있어서는 미미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한일국교정상화를 앞두고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창가학회(創價學會) 같은 일본불교의 일파는 비록 문교부가 주간하는 종교심의회(宗敎審議會)에서 「반국가종교」로 규정하여 「사교」의 낙인을 찍어놓았고 또 거기에 따라 경찰에서도 간헐적(間헐的) 단속에 나서고 있지마는 간단히 종식될것 같지 않다. 창가학회의 교도들은 일인들이 침략의 선구적 기치(旗幟)로 삼아왔던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신단을 만들어 기도하고 「동방요배」를 하는 따위의 종교의식은 확실히 반국가적 행위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실로 비참한 무지라고 하겠다.
과거 36년간 우리나라 방방곡곡 그 어느곳에 신사(神社)가 없는 곳이 있더냐? 또 소위 대동아전쟁으로 일인들이 남의나라를 잠식해들어갔을때 그 무엇보다도 먼저 건설한 것이 곧 이 「천조대신」의 사당이었다는 점을 상기할때 한일국교정상화를 앞두고 「경제침략」 혹은 「문화침략」등의 용어가 한창 신문지상에 나돌때 이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창가학회가 한국에 침입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일이 아닌것 같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일본만큼 사신잡귀(邪神雜鬼)가 많은 나라를 볼수 없으며 또 이 잡신들을 하나 하나 따로 신앙대상으로하여 종교의 형태를 갖추었고 교세들도 만만치가 않다.
일본의 국교인 신도(神道)만 하더라도 국가신도 이외에 15개(個)의 자연신도의 종파들이 활발한 형편에 일단 비준동의를 얻어 명실공히 국교가 정상화되는 그 익일 미명을 기하여 이숱한 사신잡귀들이 현해탄을 건너 밀어닥칠것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령 위에서 말한 중세불교의 일파만하더라도 사교로만 규정지어 태평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계룡산(鷄龍山)을 중심한 그 많은 사교집단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계보(系譜)를 따져보면 불교를 토대로 일연종(日蓮宗)=정종(正宗)=창가학회의 7백년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불교적 범신론의 근본사상을 토대로 평이하게 설명하는 점, 현재의 불행·빈곤·질병·기타 정치적 불안에 이르기까지 그 해탈을 약속하는, 다시 말하면 「현상타파」의 힘을 그 교의 안에서 배양해 나간다는 현대종교의 특색을 완전히 구비해있다는 점등을 감안할때 이러한 신흥종교의 침입을 단순히 「반국가적 종교」 「일산품종교」 저속한 「현리(現利)주의종교」로만 비난하고 멸시하고 있을수만 없는 것이다. 또 모든 사교들과 동일시하여 「밀도가 높아지면」, 혹은 「교육수준이 낮은 탓으로」라는 판단으로 냉소만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창가학회는 현대인의 심리적 약점을 교묘하게 파악이용하며 그 탁월한 조직과 포교의 방식 등은 가장 현대적인 포교에 알맞는 대중운동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중세 불교의 일파가 어찌하여 가장 영리하고 현명하다고 자처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쉽게 점령했으며 어떻게 짧은 시일내 그처럼 많은 신도를 획득하여 그 교세를 확장했느냐하는 점이다. 일본에서나 또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전후 사회를 지배한 정신적 거대한 공백기(空白期)에 일반서민대중의 마음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관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서는 전후 불과 10여년에 3백만이란 교도를 획득했고 한국에서도 4·19 후에 들어와 벌써 3만에 가까운 숫자라고 한다.
현시국과 관련하여 사회의 물의를 일으킨 창가학회가 마침 논의의 대상이 되었지만 정신적 공백기와 서민대중, 즉 사회적 망각지대(忘却地帶)라고하면 여기가 곧 모든 사교와 이단의 온상(溫床)이 된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으리라. 동시에 우리의 전교맹점(盲点)이었던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반성이 요청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사명은 전교에 있다. 전교가 교회의 사명일진대 전교의 헛점(虛点)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는 「모멘트」인 동시에 국민을 사교에서 구하는 새로운 길이 여기서부터 열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의 위기(危機)가 있다면 전교의 부진일 것이다. 어찌 교회뿐이랴, 모든 위기의 극복은 전교에 있는 것이다. 국민을 사교에서 구하는 길은 전교활동에 있다고 해야 하겠다.
모든 사교가 그렇고 종교를 가장한 사기 단체들이 쉽게 노릴수 있는 곳이 바로 정신적 공백기에 있는 망각지대라면 이지대는 또한 가장 전교를 소홀히 한 지대라는 말과 같다. 과거 일제시대는 허다한 악조건으로 전교활동이 저하되더니 그 뒤를 이어 해방과 동시에 우리는 많은 전교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적인 확장이었다. 사회학적 전교에 있어서는 맹점이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선교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회의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전교방식으로, 다시말하면 횡적 전교에서 종적 전교로 그 활동방식을 재검토할 필요를 통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