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배부르고 편하게 살고저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제 묙구(慾求)를 무한정하게 밀고 나가면서 그 만족을 얻고저 허덕이며 살아 간다. 그 욕구의 종류와 정도는 사람에 따라 서로 같지 아니하다. 그중에는 서로 모순(矛盾)되는 것도 있고, 스스로 값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옳지 못하거나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다 들을 수 없는 잡다한 욕망이 한 마음에서 샘솟아 그중에서의 취사선택(取捨選擇)을 강요한다. 그 선택에는 영원히 만족할 수 있는 가치(價値)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자기의 순간적인 이해관계나 변덕스러운 욕심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야 한다는 데는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바른 기준을 찾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그 노력을 포기(抛棄)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기준에 속고 있거나 욕망의 전쟁터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다. 그들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라야 하는 그 가치 기준을 영원한 절대자(絶對者) 외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한사람이 마음속에서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관계에서도 일어난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가치기준이 물질적 욕망이라고 한다. 그 욕망이야 말로 사람이 원하는 모든 욕구의 왕자(王者)이며 최종적인 것이라도 고집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장 적대시(敵對視)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원자탄이 아니고 신(神)을 빋는 종교이다. 그 중에서도 그 이론체계가 바르고 그 신앙이 확고한 크리스챤들이 모인 가톨릭교회이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어떻게 하면 그 사회집단이 이 세상에서 부자(富者)가 되어 잘 살 수 있는 가에 관한 방법으로서 생각해낸 것이고 가톨릭은 저세상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믿고 행하게 한다. 이와같이 전자(前者)의 목적지가 이 세상에 있는 데발하여 후자의 목적지는 저세상에 있다. 그런데 유독 공산주의는 신(神)과 저 세상이 없다는데 그 토대를 두고서만 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가톨릭 신앙과 양립(兩立)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방임(放任)된 자본주의의 잘못을 경고하면서도 더욱 공산주의의 잘못을 질책(叱責)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순간의 스스로의 욕심 또는 제가 속하고 있는 사회계급의 이익 때문에 공산주의에 동조(同調)한다. 약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의 총칼이 무서워 그들의 편이 된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엘리트」라는 자들은 스스로는 공산혁명의 계시(啓示)를 받은 자로 자처하고 다른 동조자나 반대자들은 다같이 결국은 숙청(肅淸)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놀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교의에는 개종(改宗)이 없다. 세뇌(洗腦)는 잠정적 이용가(理容價)의 획득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사람은 공산주의의 목적수행을 위해서만 먹고 입고 살 권리가 인정되며 그 외에 인간의 존엄성이니 영혼이 존귀함이니 사상의 자유니 하는 것은 물론 그 생명의 존속마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다.
작년 주교회의에서 우리 신자들에게 이북(以北)에서 그들의 갖은 탄압을 받으며 흩어져 있는 침묵의 교회(沈默敎會)를 위한 기구(祈求)를 요청하였다 (매년 6·25후 첫째주일날)
우리는 스스로의 뜨거운 신앙자세를 갖추어 군란중에 있는 그 신우(信友)들의 용기와 구령을 위하여 천주께 기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