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사람은 비극적 감정에 사로잡힌다. 의기소침·비애감·불안·비하·좌절등, 이런 지감에 사로잡히는 나머지 가끔 사고의 마비, 무언, 행동의 혼란 등 상상만으로도 곤혹을 느낄 절망의 심연에 빠진다. 개성에 따라 같은 불행한 조건에서도 사람은 그 정신상태가 각기 다르다. 또 이는 선천적인 소질이 원이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혹독한 동기의 결과일수도 있다. ▲가난, 불화로 인한 갈등, 실연 등, 가까운 예로 이즘 우리가 겪은 불의의 천재로 인해 일조일석에 재물과 육친을 잃었을때 비단 박약한 의지력이 아니라도 사람은 어쩔수 없는 실의와 오뇌에 잠길 것이다. ▲뚜렷한 동기가 있든 없든, 이런 비감속에 생을 지내는 사람이 지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반드시 열등한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지적으로 정신력(영적)으로 탁월한 역사적 인물속의 예술가나 철인가운데 이런 자가 허다하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수한 문학작품속의 가공적 인물중에 흔히 이러한 성격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도스토엡스키의 「악령(惡靈)」의 주인공의 인간성은 초인간적 탁월성을 지녔으나 그야말로 악령에 들린(憑) 심리학적으론 병리적 인물이다. 또 베르나노스의 「시골 본당 신부」 얼어붙은 영혼에 신의 광명을 던져줌으로써 남을 구령하지만 스스로는 깊은 신앙과 그토록 고결한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관조하는 희열은커녕 악마의 제물이 되어 한없이 괴로워한다.』(허나 그는 이런 영혼의 모험 속에서 그 고뇌와 동시에 신의 은총을 절감한다) ▲동기의 우열을 막론코 이세상의 고통은 우리의 현실이다. 게다가 우리는 인과(因果)라던가 영혼의 정화의 수단만으로는 도저히 알아 들을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부조리의 실존적 상황에 부닥칠때도 있다. 이 궁극적 고통의 구제를 위해 인간은 온갖 이념사상을 제시하고 그 환상을 실현코자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인간 고통의 중량을 솔직히 인식시켰다. 또한 그는 이러한 「인간의 부조리의 고난」에 스스로 직면하고 최후 십자가상에서 천주께 『주여 당신은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완전한 사랑의 회생으로 이를 극복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구제의 생활한 근원적인 표상을 믿으면서 형식적 계율만을 지키는 화석화된 신앙인은 아닌지 자성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