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동에서 나의 아들 차 신부 곁에서 8개월간 체류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며 기뻐했읍니다. 지금은 내가 두고온 25명의 고아들과 다시 어울려 살기 위해 불란서로 떠납니다.
이제 나는 눈물을 먹음고 한국을 떠나지만 이제부터 내 마음은 구라파와 아시아 사이를 항시 절뚝거리게 되었읍니다. 나는 이미 노래전부터 오려고 마음먹었읍니다 어느날 저녁한 젊은이가 나더러 『나는 신부가 되겠읍니다. 』 『그래』 『나는 선교사가 되겠읍니다.』 『그래』 『나는 아시아에 가렵니다』 『그래』 이렇게 말한 그 저녁 이래로 『나는 그의 밥을 해주기 위해 그를 따라 아시아에 가리라』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여러해가 흘렀읍니다. 그리고 천주께서 이 나의 원의와 희망을 실현하도록 허락하셨읍니다.
나는 불란서에서 한국인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 사이에서 한국에 오기 위해 약간의 준비를 했읍니다. 한국에 대한 역사를 공부했고 그들의 문자와 문법과 풍습과 성인에 대해서도 배웠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막상 이 나라에 대한 아주 실제적인 생각을 나주지는 못했읍니다. 얼마나 올라운가! 질풍같이 치닫는 비행기느 채 하루를 지나지 못했는데 미국에 착륙했다가 북극을 넘었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는 「빠리」에서 서울에 와있지 않읍니까! 별로 힙 안들이고 나는 새로운 생활의 「리듬」과 새로운 생활양식에 적응할 수 있었읍니다
동양의 생활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나는 밥을 좋아하고 「유롭」에서 조차 땅에 앉기를 더 좋아하도록 아마 나는 미리 마련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맨 처음부터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더 한국이 아름답다는 사실에 놀랐읍니다.
그 찬란한 가을의 색조 겨울의 해돋이, 만발한 벚꽃 붉은 복사꽃으로 덮인 봄언덕, 이 어찌 감탄치 않을 수 있으랴!
어떤 아름다움이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매력을 감당할 수 있을건가!
그러나 내가 감동된 것은 이 자연의 조화보다도 한국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씨와 친절입니다. 그들은 외국 나그네에 대해 얼마나 후히 대접하는지 모릅니다. 불란서 사람들이 배울 점이 참으로 많읍니다.
첫째 그들의 이 환대며 그리고 그들의 달관(達觀)과 인내와 지구력(持久力)입니다. 단지 가슴 아프게 생각되는 것은 비참한 환경 속에 영양실조가 된 어린이들과 환자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불란서로 돌아가 한국 사람들의 이 어려움을 똑똑히 설명하여 불란서 사람들이 후진민족을 돌보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책이임을 깨닫도록 시급히 그리고 활발히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위급하는데 진력할 것을 나의 「의무」로 살겠다고 생각했읍니다.
『나는 배가 고프다. 그러나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나는 또한 한국여성들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들의 용기, 헌신, 하루하루의 고달픈 노동, 등에 아이를 업은 어머니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것을 본 나는 찬탄을 금치 못했읍니다 모든 점에서 동양과 서양이 그렇게도 다른데도 내가 경탄해 마지 않았던 것은 역시 모성애와 아이들이 우는 것은 같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수녀님이 내게 말하기를 『한국은 마치 매력있는 애인과 같다』고 했읍니다.
참으로 동감입니다.
2천년전 역사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읍니다. 씨사가 불란서를 정복하려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VENI, VEDI, VICI)』 한국에 대해서는 나는 말할 수 있읍니다.
『나는 왔었다. 보았다. 사랑했었다』고.
車 크리스티아노 神父 慈堂 데샹 女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