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보기드문 수마(水魔)가 이강토를 휩쓸어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수마가 빚어낸 탄식과 헐벗음과 배고픔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귀전을 메아리치고 있다.
한편 뜻있는 인사들의 수재민구호의 절규는 높아가고 사랑의 손길은 거리거리에서 구제금품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더구나 언어가 다르고 국민성이 다른 미군들까지도 구호작전 일선에서 동적인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리만큼 모든 희생과 사랑을 아끼지 않고 있는 이때다.
그런데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에 「박애」를 그 생활원칙으로하고 그 행동의 충심으로하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느냐? 누구보다 먼저 거리에 나서서 형제애를 호소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솔선수범해야할 우리가 아니냐?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시간에 그 사랑에 너무나 인색한 것만 같다.
마치 형제들의 비참과 울음소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것이 그리스도인들인양 이들을 구하자는 사랑의 운동에 우리의 참된 참여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서 우셨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오셨다. 그리스도는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미소한자 중 하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것을 주는 것은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 주위의 헐벗음과 굶주림의 소리는 곧 우기가 스승으로 받드는 그리스도의 소리임을 모른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말씀한마디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동족애」라는 순수한 인정으로서 수재민들에게 동정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소극적이란 웬말인가?
사랑은 설교의 대상이기전에 산행동이어야 한다. 입으로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치고 실천의 증거가 없다면 이는 「바리세이」적이요 「회칠한무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또하나의 「골고타」를 보여주는 가증할 죄악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의 크리스챤에게는 이같은 「스켄달」이 전무하지 않다.
의식적으로 수재민의 곤궁을 외면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구제금품을 얻으러간 사람들을 도리어 냉소하는 이가 있다. 도대체 이러한 사람들이 믿고 이러한 사람들이 설교하는 그리스도교는 무엇인지 반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다시 한번 생활화한 신앙에로 눈을 돌려야 한다. 『선행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야고버 종도는 말씀하셨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도 죽은 신앙속에 알맹이 없는 껍질을 손에 들고 있는 가련한 자들이다.
때는 왔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때는 왔다. 물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바른손이 선행을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원칙대로 몰래 천주님 앞에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재산이나 정력은 고스란히 쌓아두고 다른 사람들이 주는 밀가루 푸대를 나누어주면서 자기들이 한것처럼 생색을 낸다는 것은 더욱 깊이 반성해야할 일이다.
불쌍한 과부의 은전 한푼이 부자들의 은전 열푼보다 더욱 가치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능력대로 단 일원이라도 우리의 사랑을 표시한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보화를 하늘에 쌓을것이다. 형제애를 떠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일을수 없고 동포애를 떠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있을 수 없다. 한마디로 불쌍한 형제와 이웃의 사랑을 거치지않고 그리스도에게로 직행하는 사랑의 지름길은 있을수 없다.
때는 왔다. 사랑의 실천을 할때는 왔다. 애긍시사하는 것은 첫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활을 통해 전달함으로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요, 둘째는 하늘나라에 영원히 썩지않는 보화를 쌓는 길이요, 셋째는 우리의 과거 불우한 행위에 대한 보상의 길이다.
먹지못해 입지 못해 허덕이는 형제들에게 정성어린 사랑의 선물을 보내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애긍시사는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길이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갈지는 몰라도 이웃의 곤경을 외면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긴 힘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