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형에게… / 강성호(전남 소록도 천주의모친성당)
Y형! 오늘도 또 「가톨릭시보」를 받았읍니다. 누굴까? 누가 나에게 보내었을까? 곰곰히 기억을 더듬어 올렸으나 모를 일이었읍니다. 그러나 결국 바로 당신임을 알수 있었읍니다. Y형 이젠 염치없이 주일이 기다려지기도 한답니다. 저도 모르게 이 신문이 다정한것이 돼버렷나 봅니다. Y형 언제까지 숨기시렵니까. 그리고 무엇때문에 먼 남쪽 바닷가에 묻혀있는 저에게 이것을 보내야했는가를 말씀해주시지 않으렵니까? 제 딴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외곬으로만 도는 저를 천주님의 품안에 들라는 형의 간곡한 정성이라고. 곁엔 신부님이 항상계시고 또 멀리서나마 걱정해주시는 형이있는데 그러나 Y형 불안하기만합니다. 영세를 받은후 죄를 짓기를, 받기전과 다름이 없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 저의 주위엔 많은 영세교우가 있읍니다. Y형 남의 그릇됨을 탓할것이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충실해야됨을 깨닫고 있읍니다. 오늘 「시보」를 받아들고 전 다시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나 자신부터 먼저 양심에 거리낌없이 행동하리라. 그다음부터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의지하고 구해보리라….
■ 감정의 여울목 / 정글라라(김해 천주교회 가정주부)
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세입교한 덕분이라 하겠다. 12시간의 연탄 「게스」속, 질식에서 다시 살아났으나 나 자신을 억누르는 허무와 절망은 여전히 주체할 길이 없어 이거리 저거리를 쏘다였다. 그날도 무거운 걸음으로 거리를 헤매다 문득 발을 멈추었다. 「삼덕동 천주교회」 앞이었다. 허탈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니 흰 성모상이 눈에 뜨인다. 『성모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갈길을 가르쳐 주소서』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 속에는 이런 뜨거운 절규가 솟아나왔다. 이튿날 새벽 차거운 밤공기 속에서 나는 성당철문이 열리기를 고대했다. 삼종이 친다. 가슴에 벅찬 야릇한 감회에 젖으며 나는 모여든 무리속에 끼어 멋모르고 미사에 참려했다.
그후로 교리를 배워 영세한지 2년, 지금도 서럽고 고독할때나 분하고 억울할때 성당에서 말없이 맞아주시는 성모님, 그앞에 서면 감당할수 없었던 아픔의 목메임에 감정의 여울인양 곱게 다스릴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 낡은 思考方式 / 金아나시오(대건 대학예과 2년)
현대사회는 아주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일도 많아졌다. 여러 교회 산하단체가 어느 정도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근본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JOC 레지오 활동만으로는 부족하고 모든 신자가 여기에 다같이 의무감을 가지고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을 느끼고 있으면서 자기만은 「차안에 부재」라는 듯, 이기적인 특권의식(?)을 가진다. 더구나 그들의 대부분이 『우리는 이제 뭐』하며 자못 점잖을 뽑는 갓 결혼한 30대 청년들이다. 그들은 훨씬전에 견진성사로 영신적 어른이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이제 영육이 함께 어른이 되었으니 조건은 더욱 좋다. 견진성사는 무엇하러 받는 것이지. 모쪼록 낡은 사고방식과 영적태만에서 벗어나 평신도 사도직에 적극 참여해주기 바란다.
■ 「보좌신부님」 / 윤기형(광주 상무동)
너무 빈번한 신부 이동은 신자영신생활에 다소나마 영향이 있지않을까 합니다. 주임신부는 한 본당에 가시면 보통 5·6년은 계시니까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고해신부를 바꾸지 않고 영신생활에 보다 많은 도움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좌신부는 오신지 불과 반년, 심지어는 4개월도 못 넘기고 전속된다는 「정들자 이별」하는 것 같다는 여론입니다. 이럴때 신자들은 은연중 심중에 타격을 받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심중을 헤아려 보좌직도 2년 내지 3년, 이게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1년 이상쯤은 계셔주었으면 합니다.
또 여기에 부수적인 일, 오신다고 환영식, 가신다고 송별식을 베푸는데 이것은 의당 있어야될 신자들의 인사표시이긴 하나 가난한 교우들은 마음만은 지극한데 표시할 무엇 가진것이 없으니 이 또한 딱한일이 아니겠읍니까?
■ 고해소 / 박영호(전남 병무청 총무과)
세대가 바뀜에 따라 성당도 현대식 건축양식을 갖추어 전국 각처에 다투어 건립되었다. 그 한구석 고해소에서의 이야기이다.
신속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해를 주기위해 양쪽에 고해방이 있고 신부님이 한쪽에 고해를 주고 있는 동안 한 사람은 으례히 다른쪽에서 대기하고 있게 마련이다. 이제 첫고해한 어린이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고해방에서 나와 하는말인 즉 『나 어떤 할머니의 죄 다들었어요. 조그마한 구멍사이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들리잖아요.…』 이런 사실은 비단 이 어린이에게 국한된 것일까? 나 자신 어떤 때는 고해소에서 그냥 뛰어나오고 싶었던 것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들으려해도 내귀에는 상대방의 고해가 자꾸만 들리지 않는가. 진정 딱한 일이다. 고해소만은 천중소리도 안들리게 완전 방음장치가 되고 고해소의 작은문은 특별 제조하여 소리가 세지 않도록 만들어 모든 신자들이 마음 놓고 죄를 고백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 沒理解 /송문호(충주 아현본당)
현대 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건전한 남녀교제내지 공동활동 등은 부모나 주위사람들로부터 반대는 커녕 이해와 협조를 얻을 수 있음을 누구나 이해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향리에서는 성당학교나 청년들의 모임에서 남녀간에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거나 상호협조해야할 일에 있어서도 뒷소문이 생기고 손구락질을하는 등 몰이해도해야할일에도 추춤하는 수가 허다하다. 모성당 주일학교 선생 M는 B라는 부모없고 외로운 한 처녀를 동정하여 지도해주고자 중학 강의록을 비롯하여 집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했는데 얼마안가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펴져 M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일할 용기를 잃었다고 했다. 단순히 세대의 차이라고 믿어버릴 수 없는 점점 고립되고 폐쇄되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이들 개개인의 폐쇄적이고 고루한 사고방식을 계몽할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는데는 교회기관에서부터 선구적 역할을 해야될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