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일단의 대학생들이 어느 벽지에서 열흘간 「웤캠프」를 열었다. 모대학 YM·WCA와 모교구 가톨릭학생연합회 공동주최로된 이러한 모임은 아마 우리나라에선 처음이 아닌가 싶다. 대체로 성공적이었고 특히 「에꾸메니칼」 운동을 위해서도 많은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주교님 안에서 같이 진료하고 봉사하며 함께 명상하고 기도했으며 여름밤 한자리에 둘러앉아 「리크리에숀」을 즐기는 등 실로 뜻깊은 열흘간이었다. ▲그러나 저쪽예배식과 이쪽 미사에 참석해보면 피차 좀 어색한 모양이다. 이런 기분은 어떤 의미로 오히려 당연한건지도 모른다. 각기 제나름의 신앙에 길들어온 이들이 생소한 타종교 의식에 참석해서 서먹할 것은 정한이치가 아니겠는가. 저쪽이 우리미사에 참석하고 좀 형식주의 혹 의식주의 같다고 비난한다해서 타갑게 여길 필요는 전혀 없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한거고 그러한 대화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공동입장에서 피차의 상이점을 기탄없이 토의함으로써 보다 긴밀한 누대를 갖게 되는 것이아닌가. 그러나 남의 집회에가서 어색한 기분이 되기전에 먼저 대화를 하는 이상, 적어도 상대방의 신학적 입장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리시즘」의 역사에 대한 이해 및 난점을 최소한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의 신앙을 알고 또 그 신앙의 실천을 몸에 지녀야 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몇몇 학생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소위 종교를 통해 학생운동을 하는 그들 「엘리트」의 생활한 신앙에 의하심을 갖고 일말의 서글픔을 느꼈다. 우리의 종교생활에서 어떻게하면 신앙을 좀먹히지않고 보존할 수 있을까. 옷이라면 벗어서 「나프탈린」을 넣어 이 다음꺼내 입을때까지 옷장에 간직하면 된다. 그러나 신앙은 옷처럼 입었다 벗었다 하는게 아니다. 신앙은 벗어버릴수 없는 몸에 배인 것이다. 그것은 영혼속에 끊임없이 살아있어 우리의사언행위를 다스리기 때문에 신앙이라 불린다. ▲10일간의 무료진료 근로봉사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요 증인임을 농민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 황무지의 농촌보건에 그건 가뭄의 빗방울 턱이나 됐을까. 음주와 도박으로 피폐된 몽매하기 짝없는 농민들을 위해 「흙」의 주인공 같은 젊은이를 기대한다는건 이즘시대엔 참으로 소설같은 이야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