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史의 한 「에포크」의 「무드」가 된 第2次 「바티깐」 公議會는 끝나고 그것이 남겨준 막중한 과업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다. 世界公議會를 뒤이어 이 地上 各國에서는 地方主敎會議를 열어 公議會가 넘겨준 과업을 연구검토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간 여러차례 全國主敎會議를 열어 韓國敎會現代化作業에 전력일 기울이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의 契機가 마련되면 성급한 結果를 보려고 한다. 금번 公議會에 대해서도 전격적인 急變을 보려하고 더구나 한국 主敎團의 全國會議가 있을때마다 순서에 맞지않는 結末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尙今 우리의 태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第2次 「바티깐」 公議會 閉會式典에서 하신 敎宗의 말씀을 되새겨보자. 『이제 우리는 땅을 파헤쳤읍니다. 지금부터 그 땅에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고 했다. 敎會現代化라는 作業을 서두르면서 이제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땅을 파헤쳤다』는 것은 새로운 契機를 만들었다는 뜻이고 『이제 씨를 시어야 한다』는 것은 公議會 以後 우리가 해야할 使命을 천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敎宗의 말씀 그대로 16個 敎令을 通해 앞으로 敎會가 가야할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야할 새 길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한다. 하나의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도 먼저 설계도에 따른 청사진을 그려놓고 심사숙고 하여 앞으로 세워질 건물의 상황을 연구 · 검토해야 한다면 더구나 「敎會現代化」라는 大業을 앞에 놓고 이것을 實現하기 前에 먼저 충분한 硏究와 認識이 必要할 것은 再言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바티깐」에서 우리에게 시사한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6月 17日字 「바티깐」紙 「옷세르바또레 로마노」에서는 敎宗自發令(MOTU PRO PRIO)을 通해 이번 公議會가 發表한 敎令을 6월 29日을 기해 發效日字로 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더 많은 硏究가 필요하기 때문에 發效日을 延期할 것이라는 내용을 밝혔다.
또 한편 外信에 依하면 오는 9月에 구라파에서는 이번 公議會를 主題로 하는 世界神學者大會가 있을 것이라 한다.
間의 形勢를 이같이 推理컨대 現今 우리의 태도는 送意회의 實現을 보려하기 전에 먼저 公議會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연구하고 묵상해야 할 일이다. 특히 한국가톨릭은 구라파와 달리 異質的인 風俗과 生活樣式을 가지고 있으므로 公議會 精神을 어떻게 하면 한국 敎會에 알맞게 適用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세심한 주의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본다. 금년들어 벌써 2次에 걸친 韓國主敎團會議가 있었고 여기서 決議된 案件을 本紙에서 發表한 바도 있다.
公告된 決議案에 對해 몇몇 敎友들은 失意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其實 主敎님들도 一般信徒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충을 가지고도 이나라 가톨릭의 現代化를 위해 전심전력하고 계신 것이다. 언제나 循環이 순조롭지 못한 經濟的인 條件이라든지 不足한 人的資源 等等의 惡條件 속에서도 敎會의 앞날을 위해서 온갖 정력을 쏟고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主敎團의 決議에 受動的인 태도를 취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敎會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能動的인 적극성을 보여야 하겠다.
누구나 할 것 없이 公議會의 精神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그것을 生活化하는 것이 現今 우리들의 精神的인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사족을 부친다면 敎會의 指導者들은 막연히 公議會를 연구 묵상하자고 하기 前에 公議會의 精神을 PR하는 기구를 조성해 주어야 될 것 같다.
구체적으로 열거한다면 공의회가 발표한 敎令集을 발간 또는 그 해설집을 발간하여 大衆認識을 시켜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때는 전대사를 얻는 條件을 내세워 全國的으로 公議會 계몽강연회가 개최되었는가 햇더니 요즈음에 와서 숙지막해진 것 같다.
벌써 閉會式을 했는지는 모르겠거니와 아직도 公議會의 精神을 모르고 있는 信徒의 數는 大多數가 아니라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 敎會는 한결같이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 아래 지금이 공의회를 연구하는 時代라고 한다면 한편에서는 연구할 수 있는 계끼를 만들어 주고 또 한편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조로운 公議會 循環이 시급한 것 같다. 이것이 곧 공의회를 이나라에 實現시키는 오늘의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