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역사적인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제4회기 즉 최종회기가 개최된다. 이에 참석코자 한국주교단도 전국교회의 축원과 환송을 받으며 8일 공로(公路)로 「로마」를 향해 떠났다.
출발을 앞두고 각 교구 주교님들이 부탁하신대로 우리는 이제부터 공이회의 성공을 위해 간절히 기구해야할 것이다. 공의회성공이란 물론 이 회의가 단순히 원만히 진행되고 유종의미(有終之美)를 거두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목적하는바가 우리들 신자개개인을 비롯하여 전체교회안에 성취돼갈때 공의회는 참되이 성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공의회의 목적이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자각과 쇄신임을 알고 있다. 물론 공의회는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기하고 상호이해와 사랑을 토대로한 세계와의 대화를 또한 목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일치도 세계와의 대화도 교회자체의 자각과 쇄신없이는 하나의 공념불(空念佛)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간에 해야할일은 공의회가 잘 진행되고 원만히 종결되도록 기구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자신이 그리스도자(者)로서의 실존과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고 우리자신의 일상신앙생활부터 공의회의 정신과 그 제시한 길을 따라 쇄신되도록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각하고 쇄신돼야할 교회란 다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성직자와 신자를 합한 우리 모두-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요청은 가톨릭인 한 세계도처 누구에게나 다 같이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 더욱 가중된다고 생각한다. 이유인즉 한국의 현실을 살펴볼때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란 「가톨리시즘」 외에 달리는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 작금의 정국의 파탄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리사회는 너무나 빈곤하다. 돈도 없거니와 민족을 이끌어줄 정신도 없고 그 진로를 밝혀줄 빛이 이 땅에는 없다. 모두가 실의(失儀)에 차있고 모두가 현실도리와 체념(諦念)을 유일한 구체책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인간과 사회구현의 사명을 가장 힘차게 발휘해야할 곳이 바로 이같은 한국사회에 있어서가 아닌가? 또한 한국안의 그리스도자(者)가 그 자신의 실존의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와 형제, 이웃과 겨레를 구하는 사명을 자각해야 할 때가 바로 이 시간이 아닌가?
우리는 교회의 자각과 쇄신을 전례용어 혹은 기타 제도와 형식의 현대화로만 착각하여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자각과 쇄신을 도우는 방편은될 망정 교회의 자각과 쇄신 자체일수는 없다.
한국교회의 자각 내지 쇄신은 한국이라는 그가 처한 사회와 그가 구해야할 민족의 현실을 도외시할 수는 절대로 없을 뿐아니라 도외시해서는 참된 의미의 한국교회의 자각도 쇄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우리사회의 정신적 물질적 빈곤과 그 고뇌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가? 그 옛날 그리스도께서 대중사이에 들어가 대중의 가난과 비참을 함께 나누셨듯이, 오늘날 이 나라안에 그리스도의 구원사명을 맡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 나라의 대중의 간난과 비참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이 시간의 한국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가?
지나친 판단일지 알수 없으나 우리는 이같은 설문(說問)에 긍정적인 답을 주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우리는 분명히 연년(年年)히 수만의 신자수를 증가시키고 있다. 성당수가 늘고 시설이 커가는 등으로 한국교회는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 못하고 있다. 아니 사회와 그 인간에 대하여 구원의 희망과 「비젼」이 돼야한다는 근본적인 교회사명에 있어서는 우리는 너무나 미약하고 거의 영향력이 없다는 실정이다. 도처에 높이 솟은 성당종탑이 우리를 위해서는 기쁨이요 자랑일수 있으나 이 민족사회를 위해서는 별 큰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백성을 위해 진리와 등대로서의 역할을 다 못하고 있다.
그뿐이냐? 우리는 도대체 가난하고 헐벗은 대중을 위해 무엇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가? 우리는 남들이 보내준 밀가루를 나누어줌으로써 우리 스스로 큰자선사업이라도 하고 있는양 생색을 내고 자위자만하고 있지 않는가? 확실히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서민대중의 벗이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우리는 입으로만 말하였을뿐 행동으로써 증거하고 나아가 사회적인 사랑의 운동으로써 전개시켜 본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의 설교란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울리는 구리(銅)나 소리나는 꽹과리』(코린토전서 13장 1)가 아니며 『선행없는 죽은 신앙』(야고버서 2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의 자각과 쇄신은 이같은 근본에서부터 출발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의 문제를 이해하고 대중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는-도울 수 없으면 적어도 그들의 가난과 고뇌를 함께 나누는-교회가 돼야할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스스로 가난하고 사랑과 희생으로 이 사회와 그 인간에 봉사하는 교회가 돼야한다.
이 나라를 구하는 십자가를 질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들이요 다른 무엇도 아닌 한국교회이다. 우리는-즉 우리로서된 한국교회는-이 나라 사회의 가난과 모든 인간적 비참과 고뇌를 지고 일어서야 한다. 한국말이 전례용어가되고 성가를 한국적 정서에 맞추어 만들고 성당건축을 한국식으로 하면 교회가 한국적이되는 것이 아니다. 민족사회를 구하기 위해 참으로 헌신할때 교회는 진정 한국의 교회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될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이다.
공의회 최종회기 개회와 더불어 순교선열들을 기억하는 이 9월에 우리는 참되이 이 선열들의 순교의 정신을 본받아 공의회가 제시하는 쇄신의 길에 들어서리라는 다짐을 굳게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