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쟁이 국부전쟁이기는 하지마는 人類의 平和를 저해하는 全世界의 關心거리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치는 6·25동란, 그때 自由 우방의 협조로 다행히 우리는 오늘의 自由大韓을 개가하게 된 것이다. 自由 우방의 平和守護라는 공동운명을 지닌 우리 대한민국도 월남전쟁에 無關心할 수는 없었다. 그간 수만의 人力을 동원 파견하여 人類平和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월남전에서 많은 희생자들도 냈다. 외신보도에 의하면 우리 國軍은 월남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며 우수한 軍人으로 평가되고 있는듯 하다.
인류평화에 공헌을 남긴 파월장병 일진이 귀국함과 때를 같이하여 또 하나의 백마부대가 월남으로 간다. 거기에는 두분의 군종신부와 수백명의 교우군인이 끼어있다.우리는 여기 파월장병에 對한 어떤 政治的인 問題를 論하자는 것이 아니고 수만의 조국의 아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과 피를 쏟고 쓰러지는 그 자리에서 구령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軍宗神父들의 활동, 구령문제를 심각히 느끼면서 영혼이 양식을 목말라 하는 가톨릭장병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몇가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첫째로 비록 信仰이 없는 그들도 죽음이란 不可抗力的인 問題가 부닥칠때는 本來의 人間 모습으로 돌아가 神을 찾는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에 놓여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들에게는 한장의 신문이나 한권의 책자가 唯一한 벗이 될 수 있고 구원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죽음을 목전에 둔 敎友 장병들의 구령문제이다. 그들이 戰場에서 쓰러질 때 누구를 부르짖을 것인가? 마지막 영혼의 길을 열어주는 神父를 찾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로 수만 영혼의 구령 문제를 책임진 모든 군종신부들의 여러가지 악조건에서 오는 착잡한 마음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놓고 우리로서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우리는 한장의 신문을 보내줄 수도 있다. 기도서나 전교서를 보낼 수도 있다.
그들의 구령문제를 위해 아침저녁 뜨거운 기구를 바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특히 일선에 종순하는 神父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 무엇인가 작은 희생을 들여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큰 영혼을 구하는데 경솔하지 말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