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들창밖, 토담위에 떡잎져가는 호박잎들이 시원한 비바람에 끝없이 서글거리고 있다.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게 비가 처적거리는 바깥날씨도 앞산마루에 짙게 뭉친 안개조차 시원한 느낌이다. 20년래의 폭서에다 한국최고의 수은주 기록을 내는 이 지방 더위고 보니 걸핏하면 무슨 잘못된 일이나 엉뚱한 짓을 저지러놓고도 어째 모두 돌았는게 아니냐고 서로 계절핑계, 불쾌지수도 되우치켜들더니 이제는 탓할만한 더위도 다갔다. ▲일전엔 늦게 퇴사하여 어두운 바깥에 나서니 어느새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는데 유럼없이 빈손으로 나선 스스로를 탓하면서 물에 쫄딱 빠진 형국으로 집에 이르러 폭소와 채근을 받고야 비로소 우산을 아침에 가져나와 놓고는 사무실에 두고 온 걸 깨달았다. 건망증은 이쯤되면 도가 넘는 감이지만 자기자신만을 낭패시키는 건망증은 남에게 선의의 웃음거리가 되므로 약간 유쾌하기까지 하다. ▲건망증은 태초 인간이 원죄로 인해 과성은혜를 상실함으로써 얻은 인간의 약점과 가변성(可變性)으로서, 실락원(失樂園) 이래 인간에게 없어서 안될 속성일 것이다. 망각이 없이 현세를 어찌 살 것인가? 이 불완전한 세계, 정신적인 약자에겐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은 이 괴로운 세상에서 잃어버린 과거는 역시 잊어버려야 한다. 이는 인간의 약점이면서 또하 능점(能点)이 아닌가. ▲건망증에도 가지가지. 남을 웃기는 익살맞은 건망증, 남에게 베푼 은혜에 무심할 수 있는 기분좋은 건망증, 입은 은혜를 잊는 몰염치한 건망증, 이해관계 없이 약속을 다반사로 어기는 타상적인 건망증, 잔돈 꾼것은 아예 잊는 얌체건망증, 원고청탁을 독촉하면 잊어먹었다는 저명인사의 건망증은 관록건망증이라고나 할까?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고도 건망증은 무의식중이고 보니 죄도 못된다(양심적으론). 허지만 이렇게 자타에게 용인되는 건망증도 모호한 구석이 있을 때가 있다. 사람이 『정직과 부정직이 혼동하는 그 희미한 양심의 경계선』(가드너)에서 배회할 때 건망증은 가끔 자기 변호와 이득을 위한 「의식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순수한 건망증의 한계를 넘어선 건망증이 아닌 건망증 즉 양심의 건망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